철학 (작가별 분류)/Gilles Deleuze

9.20. 메모: 들뢰즈의 칸트 해석에 깔린 저의

CucuClock 2023. 9. 23. 2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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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9.20 메모

 

 질문을 정리하면서 지금까지 공부한 내용들이 하나로 쫘자작 연결되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그동안 공부한 게 헛짓은 아녔다는 생각이 드는 한편, 얼른 공부하고 다음 단계를 바라봐야 할 주제들도 여럿 생겨난다. 아무튼 나는 이것으로 전체를 알아야 부분을 이해할 수 있고, 부분을 알아야 전체를 이해할 수 있으므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해석학의 유명한—내가 알고 있으면 유명한 것임—역설을 조금은 넘어선 것인지 모른다... 간만에 혈이 뚫리는 기분이 들었음.

 <칸트 미학에서 발생의 이념>에 대한 요약문도 기필코 적을 것이다.

 

9.20 근대미학연구 수업에서, <들뢰즈의 칸트 해석에 깔린 저의>

(<칸트 미학에서 발생의 이념>을 읽고)

 

 칸트가 《판단력비판》을 쓸 때의 의도는, (들뢰즈의 목표와 같이) 일치 발생의 원리를 해명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칸트는 자신이 벌려 놓은 이론철학과 실천철학이라는 철학의 두 영역 사이에 생긴 심연을 이어 줄 보완물로서 판단력에 대한 비판을 수행하고 있지만, 들뢰즈는 애초에 앞의 두 비판 자체를 근거짓는 것이 《판단력비판》에 이르러서만 가능해진다고 쓰고 있습니다. 이것은 칸트가 앞의 두 비판에서 중요하게 다뤘던 문제들이 그렇게 다루어질 수 있었던 이유를 밝혀내는 훌륭한 주석가로서의 면모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들뢰즈가 이전에 시도된 바 없던 방식으로 칸트를 발생적으로 읽어 낸 데에는 매우 교묘하고 정치적인 의도가 숨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 저의란 다름아니라, 칸트의 체계 전체가 (칸트가 예지계적인 자유에 주고 있는 중요한 역할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감성계에 속하는 존재자이다’라는 사실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을 보임으로써, 이후 그의 철학의 나아갈 방향을 잡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합니다. 곧, 들뢰즈의 이 글은 주석가로서 칸트에 대한 자비로운 해석인 동시에, 그가 칸트와 본격적으로 대결하고 넘어서기 위해서 수행하고 있는 물밑 작업이라고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칸트 미학에서 발생의 이념>의 논의는 1) 취미판단의 분석학, 2) 숭고의 분석학, 3) 취미판단의 연역, 4) 천재론에서의 연역의 순서로 이루어집니다. 1)에서, 들뢰즈는 취미판단에 대한 분석이 능력들의 일치된 작용을 보여주고 있을 뿐, 우리가 그로부터 능력들의 자유로운 일치의 발생을 연역해낼 수는 없다고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우리는 상상력에 대한 그의 (혹은 칸트의) 해석에 어떤 감성적인 모티브가 침투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취미판단에서 상상력은 직관에 주어지는 대상 없이 대상의 형식에 대한 반성 작용을 행합니다. 그것은 우리 직관에 대해 주어지는 대상의 색이나 소리와 같은 질료적인 형식과는 다른 것으로서, 여기에서는 “오로지 모양dessin만이 중요하며 구성composition만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대상의 질료적 측면을 추상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그것을 시간선 위에 속한 것, 어떤 방식으로든 공간상의 연장을 갖는 것으로밖에 생각할 수 없는 것은 아닐까요? 들뢰즈는 명시적으로 취미판단에서 지성과 상상력의 자유로운 일치가 상상력이 직관의 형식을 빌려 옴으로써만 가능해진다고 말하고 있지는 않으나, 우리는 ‘모양’이나 ‘구성’이라는 용어법으로부터 분명 어떤 시공간적인 이미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2)에서 역시, 우리가 수학적으로든 역학적으로든 숭고함을 느끼게 되는 ‘대상’이 요구되는 듯 보입니다. 숭고의 감정은 우리가 어떤 광대하고 강력한 것을 마주했을 때, 상상력이 그것을 포착할 수는 있되 총괄할 수 없게 되면서 한계에 맞닥뜨리는 것으로 생겨납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도 우리는 상상력이 포착할 수 있는 감성적으로 주어진 어떤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본격적으로 미적 판단에서 능력들의 일치가 어떻게 가능해지는가를 밝히고자 하는 3)에서는, 대상의 실존과 질료에 무관심한 주관적인 합법칙성이 우연히 외적인 자연물과의 일치를 담보하는 이성적 관심이 다루어지기 시작합니다. 여기에서도 우리는 주관적인 일치를 이성이 그것에 대하여 향하게 할 수 있는, 어떤 자연적인 대상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 인식 능력의 조화로운 일치는 어디까지나 우리가 감성적 존재자인 한에서 가능한 것이 됩니다. 들뢰즈가 칸트를 ‘발생’의 관점에서 읽어내고자 하는 것은, 칸트의 체계 전체가 어떤 방식으로 조건지어져 그렇게 조화롭게 작동하는가를 밝혀내는 작업이기도 하지만, 예지계적인 자유에 언제나 우위를 두었던 칸트 철학이 사실은 감성적인 것에 기대고 있음을 교묘하게 드러내는 작업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차이와 반복>이 ‘꿈에서 쓴 순수이성비판’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것을 생각해볼 때, 들뢰즈는 칸트를 뛰어넘기 위해 (칸트식의) 전제된 일치 속에서 가공된 경험이 아니라, 일치가 발생하기 이전의 실재적 경험이 우리의 인식과 세계관을 처음부터 조형해 가는 원리에 대해 말하고자 했을 것입니다. 들뢰즈의 철학이 ‘초월론적 경험론’이라고 불리는 것은, 그가 칸트로부터 얻어 온 발생의 모티프를 밀어붙여서 인식 자체의 조건이 되는 (초월론적) 실재적 경험의 작용을 밝혀 내고자 하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감성계에 은밀하게 우위를 주면서 칸트 철학을 해석해 내는 들뢰즈식 발생의 아이디어를 충실히 따라갔을 때, 아래와 같은 몇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1. 들뢰즈는 능력들의 일치를 설명하기 위해 발생의 아이디어를 도입하고는 있지만, 칸트 철학을 해설하는 이 지면들에서는 어디까지나 그러한 인식 능력들이 (칸트가 이해한 바대로)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곧, 들뢰즈는 이 글에서 인식능력 자체의 발생보다는 인식능력들의 일치를 해명하는 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들뢰즈의 ‘인식능력(과 그 일치)에 대한 발생적 해명’이라는 기획이 달성되기 위해서는, 예컨대 시간의식, 공간의식, 개념과 이념 모두가 감성적인 것으로부터 구성되어 나오는 거대한 체계의 설명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요? 앞으로 들뢰즈를 읽으면서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다면 이것일 것 같습니다.
  2. 감성적인 것에 중요한 역할을 주는 들뢰즈의 초월론적 경험론은, 멀리까지 밀고 나갔을 때 칸트 윤리학에 대한 강력한 비판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칸트 철학에서 감성적인 것이란 순전히 타율적인 것이고, 진정한 자유란 감성적인 것이 일체 추상된 예지계에서만 가능해집니다. 그런데 후자가 전자 없이 가능하지 않다면, 예지계란 감성계의 부속물 혹은 어떤 환영에 불과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요? 달리 말해, 우리는 우리가 속해 있는 지금 이 하나의 세계만이 있다, 예지계란 없다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닐까요? 
  3. 칸트에 따르면, 미적 판단을 위한 원리란 일체의 이해관심 혹은 외적인 대상과는 상관없이 그 반성된 형식에 따라서만 존재하다가, 우연히 그 원리와 일치하는 대상을 마주쳤을 때 보편적, 필연적으로 쾌를 발생시킵니다. 이때 우리는 이미 우리 안에 있는 원리가 외부의 대상과 일치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관해서만 말하고 있으므로, 쾌와 불쾌의 감정에는 정도의 차이만이 있을 뿐 어떤 질적인 차이는 없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내적인 일치를 갖기 전에 감성적 존재자로서 대상들의 한가운데 내던져진 채로 있다면, 칸트의 분석은 (일체의 대상이 없는 세계에서는 권리상 유효하겠지만)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것이 되고 마는 것은 아닐까요? 곧, 일체의 이해관심이 배제될 때 미감적 판단의 보편적 원리가 있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조건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판단이 없다면 우리는 미감적 판단의 보편적 원리보다는 그 판단이 조형되는 특수한 조건에 주목해야 할 것 같습니다. 칸트의 취미판단에 대한 이론은 모든 경우에 그 전건이 거짓이고, 따라서 우리 세계에 대해 아무것도 알려주는 바가 없는 공허한 참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들뢰즈가 후기의 미학적 시기에 서로 다른 대상들이 우리에게 주는 질적으로 다른 미감적 판단들, 개념으로는 포착되기 이전의 힘을 그려낸 작가들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가 대상 없이 주어지는 선험적 원리를 거부하고 ‘언제나 어떤 대상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였기 때문일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