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6.16 메모_데카르트의 수적인 실재적 구별, 스피노자의 형식적인 실재적 구별
1. 들뢰즈는 존재 내적인 부정성에 의해 성립하는 긍정을 말했던 헤겔에 반대하여서, 어떻게 존재가 그 자신으로부터 긍정되는지에 대해 말하려고 한다. 존재가 그 자신 긍정적으로 말해지는 방식에 대해 말한 철학자로서 들뢰즈는 데카르트와 스피노자를 참조한다. 한편 그는 이 둘 사이에 성립하는 중대한 구분점을 읽어내면서, 그의 존재론적 체계의 초석을 다지고자 한다. 이 둘 사이의 차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실재적 구별’이란 무엇이고, 그들 각각이 이 실재적 구별을 어떻게 사유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들뢰즈는 데카르트의 ‘수적 구별로서의 실재적 구별’보다 스피노자의 ‘형식적 구별로서의 실재적 구별’을 참조하면서 그의 존재론적 일의성을 풀어내고 있다.
2. 실재적 구별이란, 예컨대 ‘A를 B 없이도, B를 A 없이도’ 생각할 수 있게 하는 어떤 구별을 말한다 (헤겔에서 A가 다른 것과의 구별 없이는 자신으로서 긍정될 수 없는 것과 비교해 보라). 먼저 데카르트의 경우에 실재적 구별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보자. 이것을 위해서는 데카르트가 ‘실체’를 무엇으로 파악했는지를 먼저 살펴야 할 것이다.
데카르트에서 서로 다른 속성을 가진 실체들은 서로 구별된다. 이 속성에 따라서 실체가 질화되는 방식은 달라질 수 있다. 여기에 속성들의 구별이라는 첫 번째 구별이 있다. 그런데, 같은 속성을 갖는 실체들은 그 질화되는 방식이 같지만, 동시에 또한 서로 구별되어야 한다. 여기에 같은 속성을 갖는 실체들 사이의 구별이라는 두 번째 구별이 있다.
그런데, 우리는 실재적으로 구별되는 사물들이 그렇게 구별된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A와 B가 실재적으로 구별된다는 표상은, 데카르트에 따르면, A를 고찰할 때 B를 배제하고 A만을 명석판명하게 이해할 수 있을 때 얻어질 수 있으므로, 우선 관념적으로 생기는 것이다. 그런데 이 관념적인 구별이 어떻게 해서 실제 옳은 구별이 될 수 있는 것인가? 데카르트가 우리가 완전히 파악할 수는 없되, 우월하고 탁월한 존재로서의 ‘신’을 끌어오는 것이 이 지점이다. ‘신이라는 이름으로 내가 이해하는 바는 무한하고 영원하고 불변적이고 독립적이고 전지하고 전능한... 실체이다.’ 실재적 구별의 ‘실재성’은 신의 선성에 의존한다. 피조물 가운데 그 무엇이든, 그 안에는 신과 그 피조물 사이의 근본적이고 필연적인 간극이 기입된다.
여기에서 존재들 사이의 위계라는 세 번째 구별이 있다. 들뢰즈가 ‘다의성, 탁월성, 유비’의 개념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 세 번째 구별이다. 신은 무한하고 전능하다는 점에서, 유한한 피조물이 결코 온전히 접근하거나 파악할 수 없는 것이다. 신은 피조물과 같은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의 다의성). 그것은 실재성 전체를, 피조물과는 다른 방법으로 담고 있는 탁월한 것이다 (탁월성). 우리는 그것에 직접 접근할 수 없고, 단지 어떤 비유를 통해서만 다가갈 수 있을 뿐이다 (유비).
3. 한편, 스피노자는 실체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실체란 그 자체 안에 있으며 그 자체에 의하여 파악되는 것, 즉, 그것의 개념을 형성하기 위하여 다른 것의 개념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라고 나는 이해한다 (E1Def3). 그에 따르면 실체는 다른 어떤 것에 의해 그 자족성을 보장받아서는 안 된다. 그런데, 데카르트는 실체들 사이의 구별을 정당화하기 위해 그들과 존재론적으로 구별되는 신을 끌어들이면서, 실체들의 자족성을 한낱 신에 의해 ‘가능’하게 되는 것으로 떨어뜨리고 있다. 스피노자에게 실체란 그 자체 실재적으로 구별되되, 무한하면서 유일한 것이다.
먼저 동일한 속성을 갖는 여러 개의 실체가 없다는 주장을 살펴보겠다. 데카르트에서처럼 동일 속성의 실체가 다양하다고 하자. 그런데 서로 다른 실체가 존재한다면, 그들은 속성에서 구별되거나, 그 변용의 차이에 의해서 구분될 뿐이다. 먼저 동일한 속성을 가지는 실체는, 속성에 의해서는 구분되지 않고, 실체는 변용에 앞서므로 변용의 구분도 실체의 구분을 담보할 수는 없다. 따라서 동일 속성을 갖는 서로 다른 두 실체는 없다. 데카르트의 수적 구분은 양태, 곧 변용의 구분을 실체의 구분으로 혼동한 결과이다.
다음으로 상이한 속성의 여러 실체도 존재하지 않고, 따라서 실체는 유일하다는 주장을 살펴보자. 앞서 보았듯, 실재적 구분은 수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수적인 구별은 실체의 변용에서만 성립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재적으로 구별되는 속성들은 수적으로 구별되지 않고, 하나의 실체에만 대응한다. 곧, 스피노자에서 실재적 구별은 수적이지 않고 단지 형식적이다. 실체는 곧 유일한 실체이다.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일의성과 내재성의 철학으로 발전할 수 있게 되는 것인가?
실체로서의 피조물과 실체로서의 신이 따로 있는 한, 그 둘 가운데에는 존재론적 위계가 발생한다. 스피노자는 유일한 실체만을 인정함으로써 실체들 간의 위계를 배제한다. 실체를 존립하게 하는 다른 원리는 필요하지 않다 (일의성), 실체 안에 그 원리가 내재적으로 있다 (내재성). 이 실체가 자기 자신의 무한성과 필연성을 펼쳐내는 것은 속성을 통해서이다. 이것이 첫 번째 표현이다. 그리고 속성이 자신을 펼치는 것은 양태를 통해서이다. 이것이 두 번째 표현이다. 표현은 어떤 존재론적 위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무한자 (실체)와 유한자 (양태)는 속성이라는 동일한 존재의 형식을 갖는다.
4. 그런데, 존재를 이렇게만 이해해서는, 스피노자의 체계는 정적인 관점에서 유한자와 무한자가 같은 존재 형식을 갖는다는 것만을 말해 주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는 않다. 이것은 스피노자의 체계를 발생적으로 이해함으로써 해명된다.
우리는 앞서 실체를 다른 것에 의존함이 없이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으로 정의했다. 따라서 신은 자기원인이다. 그런데 동시에, 신은 속성을 통해 자신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피조물에 대한 작용원인이기도 하다.
들뢰즈가 스피노자주의에 대해 지적하는 것은, 스피노자가 ‘실체가 양태 주위를 맴돌게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양태는 실체에 분명 의존하지만, 실체 역시 양태에 의존한다. 양태가 없다면 실체는 무한한 실존 역량을 갖는 것이 아니게 된다. “신의 본질이 역량이라는 것은, 신이 실존하는 바로 그 역량 덕택에 신이 사물들을 무한하게 생산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들뢰즈에 이르러, 스피노자주의는 양태와 실제가 서로를 포함하고 있는 바로 그 관계를 완성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어째서 스피노자의 일의성 테제가 세계에 대한 더 나은 설명을 제시하는지, 들뢰즈가 스피노자를 참조하는 동기가 무엇인지는 이 글의 탐구 범위에서는 명확히 드러나지 않고 있는 것 같다. 다만 우리의 삶을 어떤 알 수 없는 초월적인 원리에 종속시키고, 피와 살을 가진 우리의 실존을 무시하는 도덕에 대한 비판의 의도가 들뢰즈 철학 전체에 흐르고 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일의성의 원리는 데카르트뿐 아니라 칸트에도 큰 타격을 준다. 칸트에게서는 감성계의 근원 존재자로서의 신과 예지계에서 요청되는 최고 실재 존재자로서의 신이 존립한다. 전자는 사변적으로는 파악될 수 없되 권리상 자연적 인과의 사슬에 우리와 함께 얽혀 있는 어떤 것이겠는데, 후자는 반대로 감성계적 존재자는 결코 다다를 수 없는, 혹은 그와는 다른 존재 원리를 취하는 탁월한 존재자인 것이다.
'철학 (작가별 분류) > Gilles Deleuze'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질 들뢰즈, <칸트 미학에서 발생의 이념> (0) | 2023.09.29 |
---|---|
23.09.27. 메모: 칸트 미학에서 이념의 의미 (0) | 2023.09.28 |
9.20. 메모: 들뢰즈의 칸트 해석에 깔린 저의 (0) | 2023.09.23 |
9.4. 메모: 일의성의 생기주의와 내재주의 (0) | 2023.09.06 |
들뢰즈 메모 2_스피노자에서 설명계열과 실체계열의 일치 (0) | 2023.08.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