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티카> 1부 발제문을 준비하면서,
박기순, <들뢰즈와 스피노자: 무한의 사유>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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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에 이르러 무한을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여기게 되면서, 중심이 부재하는 가운데 세계를 안정적으로 조망하는 방법은 무엇인가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 데카르트는 이것에 대해, 우리가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는 신의 전능함을 그 같은 안정의 고정점으로 삼는다.
학문의 영역에서는 보편수학의 이념에 따라 연장을 갖는 사물들에 대한 자연학을 확립할 수는 있으나, 사물들 그 자체는 우리에게 불투명한 채로 남는다. 곧, 신의 본질에 대해 인간은 합리적 인식을 형성할 수 없으며, 지성의 능력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란 오직 연장으로 환원된 사물들의 운동뿐이다. 우리는 실체의 한 속성—연장—만을 파악할 수 있을 뿐이지, 실체 자체를 파악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자연법칙을 파악할 수는 있을지언정 그 토대와 이유는 알 수 없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그것은 신의 불변성에 의해 보장되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온전히 파악될 수는 없는 것이다.
곧, 데카르트의 체계 안에서 실체가 속성으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것은, 신의 본성에 대한 이해불가능성, 곧 유한한 인간 지성이 신의 무한성을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신의 초월성을 가정하면서, 신적 존재와 신적이지 않은 존재 사이의 존재론적 다의성이 생긴다.
더불어, 데카르트의 설명에 따르자면 우리가 신의 활동의 결과로서 알게 되는 것이 확실한지 아닌지는, 그 결과 외적인 것 (혹은 원인으로서의 신)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 지점에서 데카르트는 흡사 계시의 논리와 같은 것을 도입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무한을 유한한 것의 부정으로서만 사유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하는 독단적 사유 이미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무한을 그 자체로서 사유할 수 있는 내재성의 원리가 필요하다. 스피노자가 보기에 데카르트식의 사고논리는 용이성에의 굴복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무한을 직접 사유하기 위해서는, 원인으로서의 신과 결과로서의 변용을 근원적으로 이질적인 것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E1Def4) 속성은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으로 파악되고, (E1Def6) 신은 무한한 속성을 지닌다.
속성들은 모두 동등한 자격으로 실체를 표현한다. 모든 표현은 본질적인 표현이 되고, 데카르트에서 발견되던 것과 같은 유한과 무한 사이의 존재론적 위계는 사라진다. 이것이 존재론적 일의성이다. 이제 사물들이 구분되는 것은 존재론적 함량의 차이가 아니라, 그들이 신을 어떻게 표현하는가 하는 역량의 차이가 된다. 종적인 차이, 본성상의 차이는 중요하지 않고, 그것이 얼마나 다양한 요소로 구성되고, 무엇으로 자신을 표현하며, 무엇과 외부적으로 관계하는가 따위가 중요하게 된다.
더불어 모든 것은 신 안에 있고, 신에 의해 결정되어 있다. 데카르트에게서 문제가 되었던 외재적 관점은 이제 제거된다. 사물들이 신에 속해 있는 한, 신과 사물이 존재론적으로 구별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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