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작가별 분류)/Gilles Deleuze

9.4. 메모: 일의성의 생기주의와 내재주의

CucuClock 2023. 9. 6.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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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메모

감각의 논리 강독 수업 1강 정리 / 질문

 

1. 생기주의와 내재주의

 최초의 철학적 물음은 이것이었을 것이다. ‘세계란 무엇인가?’ 우리에게 나타나는 가변적인 현상으로서의 세계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곧, 세계가 그로부터 비롯되고 그것으로 되돌아가는 원인이란 무엇인가? 서양철학에서 가장 먼저 이 문제에 대한 해명을 시도한 이들은 이러한 가변적인 현상을 가능하게 하는 어떤 원인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만일 이 원인이 우리에게 나타나는 현상만 큼이나 가변적일 수 있는 어떤 것이라고 해 보자. 그러면 이 원인을 그렇게 변할 수 있게 하는 어떤 원인을 다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파악된 원인이 여전히 가변적이라면?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 원인을 그렇게 변하게 한 또 다른 원인에 대해 말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만약 최종적인 원인으로 가정된 것이 어떤 것이었다가 이내 어떤 것이 아니게 된다면, 우리는 이런 식으로 무한히 소급해 올라가게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원인에 대해 생각할 때, 그 원인은 언제나 자기 자신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탈레스가 만물의 근원이 물이라고 주장하고, 아낙시메네스가 만물의 근원이 공기라고 주장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겠다. 물로부터 만들어진 세계, 공기로부터 만들어진 세계가 아무리 변화무쌍한들, 물은 언제나 물이고 공기는 언제나 공기다. 이들이 세계의 원인에 대해 말할 때, 그들은 언제나 변하지 않는 불변의 원인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불변의 원인을 가정하는 형이상학의 원류가 여기에서 발견된다. 이 입장은 이후 플라톤에게로 계승되어 이데아계에 고정된 세계의 본질이 정신적으로 있다는 주장을 낳기에 이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 10권에서 철학을 세계의 원리/원인에 대한 학으로 규정하면서 ‘아르케Arche’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이것에 따라 우리는 탈레스, 아낙시메네스, 플라톤이 파악한 것과 같은 고정적이고 불변하는 원인을 ‘아르케’라고 부른다.

 한편, 헤라클레이토스에 이르러 우리가 현상의 원인으로서 자기 자신이되 흐르고 운동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사실 변하지 않는 것은 변화, 운동, 에너지 자체가 아닐까? 헤라클레이토스가 세계의 원인으로서 ‘불’을 제시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그는 우리에게 현상하는 (이때에는 이런 말을 쓰지는 않았겠지만) 감성적인 것이, 물질과 식별되지 않는 에너지에 이미 들어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우리에게 현상하는 물질적인 것들이 저마다 어떤 질서에 의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을 인정할 때, 헤라클레이토스도 정돈되지 않은 채 아무렇게나 움직이는 불을 세계의 원인으로 내세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 ‘불’에다가 ‘로고스’라는 고유한 이름을 준다. 곧, 헤라클레이토스에게 세계란 논리적이고 질서 있게 작용하는 에너지의 운동이다. 곧, 에너지의 흐름이 곧 세계이고, 세계가 에너지의 흐름 안에 있다. 이 둘은 이렇게 언어적, 논리적으로는 ‘구분distinguer’될 수 있는 것이지만 서로가 서로 안에 들어 있다는 점에서 상호 내재적이고, 서로 ‘식별’될 수 없다discerner. 헤라클레이토스의 철학은 말하자면 세계의 원인이 끊임없이 변화하되 자기 자신으로 남는 어떤 것이라고 보았다는 점에서 생기주의적이고, 원인으로서의 세계와 현상하는 세계가 개념상 구분될 뿐 서로 식별되지는 않는다고 주장했다는 점에서 내재주의적이다. 여기에 더해 그는 세계가 우리에게 감각적으로 현상한다는 점에 주목하여 우리가 감각할 수 있는 것으로서 에너지의 원천을 설명하려고 했고, 그 결과 세계의 원인이 ‘로고스’라는 이름이 붙은 불이라고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이성주의적인 관점에서 생기주의와 내재주의를 계승한다. 현상으로서의 세계를 산출하는 것은 에너지, 역량puissance로서의 신이다. 능산적 자연으로서의 신은 무한한 속성을 지니고, 자기 자신을 소산적 자연produit으로 ‘표현’한다. 우리는 신의 무한한 속성 가운데 연장속성과 사유속성만을 알 수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신의 한 양태인 것이다. 곧, 에너지로서의 신이 속성을 통해 양태로서 자신을 표현하고, 소산적 자연에는 신이 내재한다 (범신론-만유재신론). 

 세계의 근원이 자기 자신임을 유지하는 에너지임을 주장했던 학자들은 헤라클레이토스와 스피노자 말고도 있다. 스피노자 이후의 철학자 니체는 권력의지라는 힘 개념을, 베르그송은 생명과 지속이라는 힘을 도입했다. 들뢰즈는 끊임없이 변화하면서도 자기 자신인 세계를 말했던 이 철학자들을 선배로 두고 있는 것이다. 들뢰즈에게서도 ‘힘’으로서 파악되는 존재와, 우리에게 현상하는 존재자들의 구분이 있다. 그러나 이들은 서로 개념적으로는 구분될지언정 서로 식별 불가능하다. 이 둘의 관계는 마치 구겨진 종이를 볼 때 종이와 주름을 개념적으로는 구분할 수 있지만 그 둘을 서로 떼어놓아서 고찰할 수는 없는 것과도 같다. 곧, 현상으로서의 세계를 가능하게 하는 어떤 힘으로서의 ‘존재’가 있고, 그 힘이 작용하는 운동의 결과로서의 ‘존재자들’이 있다. 그러나 이 둘은 서로가 서로를 포함하는 상호 내재적인 관계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각주:1]

 

2. 일의성

 들뢰즈의 철학은 여기에 일의성univocité의 테마를 곁들인다. 들뢰즈의 존재론을 지탱하는 세 요소는 (변화무쌍하되 자기 자신인) ‘존재’, 그 존재로부터 발생하는 ‘존재자들’, 그리고 존재와 존재자 사이 발생과 회귀의 ‘운동’이다. 이때 존재가 일의적이라는 것은, 1) 존재와 존재자들 사이의 식별불가능성과 동일성, 2) 존재자들 사이의 식별불가능성과 동일성, 3) 두 운동 사이의 식별불가능성과 등가성을 말한다. 

 먼저, 1) 존재와 존재자들 사이의 식별불가능성과 동일성은, ‘존재’와 ‘존재자들’의 개념적 구분에도 불구하고 그 둘 사이에 어떤 존재론적 함량의 차이가 있지는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의성’이라는 말이 잘 보여주듯이, 존재하는 것은 모두 같은 의미로 존재한다.

 여기에는 니체가 또한 비판한 바 있는 서구문명의 중요한 두 축, 기독교주의와 플라톤주의를 극복하려는 들뢰즈의 의도가 녹아 있다. 기독교적, 플라톤주의적 영감을 따라가자면 우리는 피와 살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와는 다르게 존재하는 어떤 것의 이념과 마주칠 수밖에 없다. 예컨대 기독교주의에서 신국과 인국의 구분, 플라톤주의에서 이데아계와 현상계의 구분이 그것이다. 혹은, 칸트 윤리에서 진정한 자유란 일체의 감성적인 것이 추상된 순수 예지계적인 영역에서만 발견될 따름이다. 그러나 들뢰즈 철학에서 신국과 인국, 이데아계와 현상계의 구분, 초월성에의 호소는 없다. 구분되지만 하나인 존재와 존재자들만이 있고, 이들의 가치는 동등한 것이다.

 둘째로, 존재하는 모든 것이 단 하나의 존재의 이름을 가질 때, 존재자들 사이의 존재 방식이나 가치 역시도 식별불가능한 것이 된다. 곧, 2) 존재자들 사이의 식별불가능성과 동일성. 이렇게 볼 때, 서로 달라 보이는 모든 존재자들이 공유하는 공통의 존재론적 영역이 있다. 들뢰즈의 ‘되기’ 개념이 가능해지는 것이 바로 이 단계에서인 것은 아닐까? 서로 같은 의미를 갖는 존재자들만이 마주침 속에서 서로 어떤 지각과 정서를 주고받으며 이전에는 할 수 없었던 새로운 역량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3)의 경우, 서로 구분되는 두 운동이 사실은 하나이며 식별되지 않는 것이라는 주장인데, 지금의 단계에서는 무슨 뜻인지 이해되지 않는다. 아래 질문에서 다루기로.

 

3. 차이와 반복

 들뢰즈의 철학은 형이상학이다. 곧, 우리가 받아들이는 세계 안에서는 보이지 않는 자연의 배후 혹은 메타 차원에 대한 해명을 시도하는 철학이다. 들뢰즈의 ‘반복’ 개념은 이 메타 차원에서 성립한다. 곧, ‘현실의 메타 차원에 매 순간 확인되는 <존재>가 있고, 그 존재는 (어떤 힘이므로 끊임없이 변화할지언정) 언제나 자기 자신으로 있다. 따라서 <존재>는 반복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해 변화하되 언제나 자기동일정인 <존재>가 반복의 역량을 갖는다. 한편, ‘차이’ 개념은 존재자들의 차원에서 논의된다. ‘현실의 차원에서 매 순간 변화하는 <존재자들>이 있고, 그 세계는 다양성diversité의 세계, 차이의 세계이다.’[각주:2] 그런데, 일의성의 철학에서 존재의 반복과 존재자의 차이는 식별되지 않는다. 존재의 반복은 오로지 존재자들의 차이에 의해서만 가능해지고 (표현되고?), 존재자들의 차이는 오로지 존재의 반복에 의해서만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4. 삶의 근본 방식으로서 차이와 반복

 존재의 반복은 언제나 어떤 차이를 낳는 반복이다. 곧, 본질적인 반복이란 존재가 자기 자신임을 유지하면서 끊임없이 어떤 차이를 가져오는 반복, 반복의 추구와 차이의 추구가 식별되지 않을 때의 반복이다. 만일 우리가 어떤 차이도 없이 언제나 동일하게 사유하고 행동한다면, 그것은 어떤 차이도 없이 동일한 것만이 돌아오는 표면적 반복이라고 하겠다. 이렇게 표면적 반복에 머무는 이들을 들뢰즈는 ‘정착민settler’라고 불렀고, 진정으로 반복할 줄 아는 사람들을 ‘노마드nomad’라고 불렀다. 

 자기 자신을 잃지 않으면서 끊임없이 차이를 불러오는 삶의 긍정, 표면적 반복에 대한 이 비판은 사르트르가 ‘비겁한 자, 더러운 자’에 대해 가한 비판과 닮아 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자유를 선고받았고, 따라서 끊임없이 어떤 선택에 직면한다. 그러나 어떤 선택이 옳은 것인가, 어떤 선택이 합리적인 것인가를 결정하는 본래적인 의미는 삶에 없다. 따라서 모든 선택은 얼마간 불합리고 부조리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택에 직면하여 불안해하고 정해진 답을 갖기를 원한다. 그러나 이것을 원하는 순간 폭력이 시작된다. 자유의 선고를 두려워하는 이들은 어떤 불변의 목표, 혹은 존재의 본질을 정해 버린다. 그리고 그것이 때로는 다른 누군가에게 강요된다. ‘너는 병사가 되어 국가에 충성하라’, ‘우리 민족은 세계를 지배할 순수하고 질 높은 민족이다’ 따위의 폭력적인 존재의 의미 고정이 전쟁을 일으키고 젊은이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것이다. 사르트르가 ‘정착민’들을 비겁하고 더러운 자들이라고 부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질문

아직 공부가 많이 부족하지만, 지난 주 수업의 내용 안에서 생각했을 때 아래와 같은 질문들이 떠올랐습니다.

 

1) 일의성의 철학에서, 존재의 반복에 대해 말하는 것이 주는 설명적 이점은 무엇인가요?

 들뢰즈가 내세운 일의성의 철학은 우리의 신체나 욕망을 도외시하게 하는 초월성의 철학과 대결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일의성에 대해 말하기 위해 들뢰즈는 ‘존재’의 차원을 이야기해야만 했어야 하는 것일까요? 달리 말해, 들뢰즈는 존재자들 사이의 작용과 차이 생성, 접속만으로 초월성의 아이디어와 대결할 수는 없는 것일까요? 예를 들어 들뢰즈는 “세계의 메타적 차원과 현실 세계는 사실 식별되지 않는 하나의 세계다”라고 말하기보다, “존재자들이 있는 바로 이 세계만이 있다. 이 세계에서 존재자들이 서로 접속하고 영향을 주고받으며 끊임없이 차이를 만든다.”라고 말할 수는 없었던 것일까요? 

 들뢰즈가 단지 헤라클레이토스의 불-세계 구분과 스피노자의 능산적 자연-소산적 자연의 구분을 따라 존재-존재자들의 구분을 내세우게 된 것인지, 아니면 이 구분이 들뢰즈의 철학에 있어 어떤 중대한 차이를 낳는 필수적인 구분인지가 지난 주 수업의 설명만으로 해소될 수 있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2) 존재와 존재자들 사이, 두 방향의 운동이 식별불가능하다는 말의 의미가 잘 와닿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이야기되는 ‘운동’을 《차이와 반복》에서 다루어지는 <이념-강도-양과 질>의 발생 과정과 같은 것으로 이해하자면, 두 방향의 운동이 같은 운동을 가리킨다는 말뜻이 선뜻 와닿지 않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운동에 대해 생각할 때, 그것은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의 이행을 함축하고, 어떤 순서나 과정 (따라서 시간)을 필요로 할 것인데, 《차이와 반복》에서 다루어지는 발생의 운동에 대해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발생과 회귀라는 운동의 양 방향이 식별가능하지 않다면, 예컨대 이념과 강도의 차원을 거쳐 양과 질이 발생하게 될 때, 그 운동은 그렇게 발생한 양과 질이 다시 강도 내지는 이념의 차원으로 돌아가는 작용을 포함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념-강도-양과 질>이라는 규정으로 나아가는 한 방향의 운동이 정확히 거꾸로 내려가는 운동을 동시에 포함한다는 것은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차이와 반복》의 <이념-강도-양과 질> 구도에 대한 이 이해가 적당하다면 어떤 의미에서 발생과 회귀의 두 방향의 운동이 식별가능하지 않은 것인지,[각주:3] 그렇지 않다면 이 ‘존재-존재자들’ 구도와 양과 질에 대한 발생적 해명의 구도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설명이 듣고 싶습니다.

 

3) 존재-존재자들의 차이-반복 (존재론)에서 존재자들의 차이-반복 (윤리학)으로의 이행에서, 존재자들의 동일성을 보장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수업 말미에서는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 개념이 어떻게 삶의 차원에까지 적용되어 정착민-노마드의 구분을 낳는지가 다루어졌습니다. 이것을 한 사람이 동일성을 유지하며 자기 자신으로 남으면서도 언제나 어떤 차이를 추구하고 실제로 그것을 불러오는 것이 삶의 근본 방식이라는 주장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수업 전반에서 다루어졌던 ‘세계의 메타 차원-현실’이라는 구분에 따를 때, 들뢰즈 철학에서 동일성을 유지하는 것은 메타 차원에서 이해되는 ‘존재’이고, ‘존재자’는 존재의 반복에 의해 언제나 그 변화무쌍함을 유지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런데 삶의 방식을 말하는 윤리학에서 이야기되는 개별 인간의 몸과 정신은 ‘존재자’이지 언제나 자기 자신으로 온전히 남는 ‘존재’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따라서 존재자로서의 몸과 정신이 어떻게 동일성을 유지하며 ‘반복’할 수 있는가, 들뢰즈의 철학에서 인간의 정신과 같은 존재자의 동일성을 보장하는 개념적인 장치가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 생겼습니다.

 

 

 

 

  1. ‘존재’와 ‘존재자’에 대한 들뢰즈의 이 설명은 하이데거가 ‘존재가 존재자들을 내보낸다’고 말했던 것을 떠올리게 한다. [본문으로]
  2. 차이와 반복에 대한 이 설명은 헤라클레이토스, 스피노자에 대해서도 유효하다. ‘세계의 메타 차원에서 매 순간 확인되는 불변하는 변화 에너지 그 자체인 불이 있다. 그 불의 동일성이 언제나 유지된다. 불은 반복한다. 현실의 차원에서 매 순간 확인되는 변화하는 세계가 있다. 세계의 다양성이 언제나 있다. 세계에는 차이가 가득하다.’ ‘소산적 자연의 메타 차원에서 매 순간 확인되는 불변하는 생산의 역량으로서의 능산적 자연이 있다. 능산적 자연의 동일성이 언제나 유지된다. 능산적 자연은 반복한다. 현실의 차원에서 매 순간 확인되는 변화하는 소산적 자연이 있다. 소산적 자연의 다양성이 언제나 있다. 세계에는 차이가 가득하다.’ [본문으로]
  3. 예를 들어, 1) 언제나 하나의 운동만이 있되, 그 둘의 방향이 동시에 구분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지, 2) 두 운동은 시간선상에서 구분되기는 하지만, 모든 존재자들이 발생과 존재로의 회귀에 있어 같은 방식을 따른다는 것만을 소박하게 말하는 것인지 등...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