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작가별 분류)/Gilles Deleuze

23.09.27. 메모: 칸트 미학에서 이념의 의미

CucuClock 2023. 9. 28.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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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27. 메모

 

칸트 미학에서 이념의 의미

 

 들뢰즈는 칸트의 《판단력비판》 중 미적 판단을 분석하면서, 그것이 한편으로는 상상력과 오성의 자유로운 일치라는 내적 일치,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내적인 일치와 자연 속 대상의 우연한 외적 일치라는 두 차례의 일치에 근거하고 있다고 쓴다. 이때 우리는 내적 일치와 자연 속 대상의 외적 일치가 어디까지나 우연히 이루어진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만일 내적으로 미리 준비된 원리에 외적 자연이 언제나 부합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보편적이되 주관적인 일치가 아니라 권리상 대상을 가지고 그것에 대해 입법하는 일치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미적 판단은 인식판단도 도덕판단도 아니다.

 그러나 내적 일치가 어디까지나 우연한 것이더라도, 우리가 미적인 쾌를 갖기 위해서는 그렇게 내적으로 반성된 형식에 부합하는 외적인 대상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이때 미적 판단에서 상상력과 오성이 이루는 자유로운 일치를, 외적인 어떤 대상과도 일치하게 하는 원리는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아니라 오성과 상상력의 일치와는 상관없이 자연으로 향하는 이성적 관심이다. 이성은 자연 속의 질료적 대상 속에서 이념들이 (어떤 상징과도 같이) 현시되는 것을 본다. 예컨대 백합으로부터 순결함을, 장미로부터 강렬함을, 맑은 물로부터 덧없음을 느끼는 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이념들은 (그것이 이념이라는 바로 그 이유에서) 오성의 개념들과는 다르다. 곧, 이념들은 대상과 오성의 개념들과도 같이 결합하는 것이 아니다. 백합의 순결함이란 결코 감성적 직관으로는 주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미적 이념이란 “개념 없는 직관”과도 같은 것이어서, “현상이 직접적으로 정신의 사건이 되며 또 정신의 사건이 직접적으로 자연의 현상이 되는 그런 [다른] 작용을 창조하는 것이다.” (인식적 판단에서 ‘이념’이 직관 없는 개념으로 파악된 것과 비교해 보라. 미적이지 않은 이념으로서의 직관 없는 개념은 권리상 잘못 제기된 물음, 곧 정신의 사건이 될 수 없는 것과도 같다.) 이 개념 없는 직관이 우리에게 정신의 사건으로 주어졌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먼저, 오성의 개념들이 무제한적으로 확장된다. 오성의 개념은, 직관에 주어져서 상상력에 의해 종합된 집다에만 적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니게 된다. 다음으로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상상력은 오성의 개념들이 적용될 것을 염두에 두고 도식작용을 수행하지 않을 수 있게 된다. 오성의 개념들이 가하는 규정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자연의 대상으로 향하는 이성적 관심은 이렇게 하여 오성과 상상력을 원래의 규정된 작용으로부터 탈구시킴으로써 그들이 자유로운 일치를 이룰 수 있게 한다.

 이렇게 발생적으로 파악된 미적 판단은 칸트가 벌려 놓은 철학의 두 영역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할 수 있게 된다. 곧, “자연의 아름다움과 연관된 [이성적] 관심은 도덕성을 향해서 운명이 결정된 심성을 증언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요약문에서 다루기로 한다). 

 

 그런데, 여기까지의 논의를 따라갔을 때 우리는 이성적 관심이 자연에서 현시되는 것으로 여기는 ‘이념’이 어떤 종류의 이념인가에 대해 의문을 가져 볼 수 있을 것 같다. 미적 이념은 ‘개념 없는 직관’으로 표현되는 정신의 사건이라는 점에서 《순수이성비판》에서 권리를 박탈당한 ‘직관 없는 개념’과는 구분된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이념들의 작용의 측면에서의 구분이지, 내용의 측면에서의 구분은 아닌 것 같다 (곧, ‘순결함’의 속성이 이 백합에 결부된다고 인식판단의 영역에서 말하는 것은 월권이지만, 그것이 인식판단과 무관하게 정신에 주어지는 사건이라면 상상력과 오성은 해방되어 자유로운 일치를 이룰 수 있게 된다). 

 이렇게 개념 없는 직관과 직관 없는 개념이 내용상 구분되는 것이 아님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이념의 내용을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하여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칸트는 개념의 사용에 있어 그 역할을 두 가지로 구분한다 (이념 또한 이성의 개념이다). 하나는 감성적 직관 안에 주어진 대상에 대해 적용되어 우리의 경험적 인식을 이루는 구성적 사용이고, 다른 하나는 감성적으로는 어떤 대상 속에서 주어짐이 없되 우리의 실천적 측면을 규제하는 (혹은 규제하기 위해 요청되어야 하는) 규제적 사용이다. 이때 이성의 개념으로서의 이념은 감성계에서 구성적으로 사용될 수는 없고, 규제적으로만 사용될 수 있을 따름이다. 이 구분을 좇아 우리는 이념을 1) 구성적으로 사용될 수 없는 개념 일반, 2) 규제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혹은 그렇게 사용되기 위해 요청되어야만 하는) 이념으로 구분해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1)은 2)를 포함한다). 

 먼저 이성적 관심이 대상 속에서 현시되는 것으로 여겨지는 이념이 1)의 경우라고 가정하자. 이 경우 우리는 플라톤에게 ‘당신은 왜 먼지, 배설물, 쓰레기, 폭력의 이데아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하는 질문을 던져볼 수 있는 것처럼, 칸트에게도 ‘당신은 왜 백합의 순결함, 장미의 강렬함에 대해서는 이야기하면서 배설물의 더러움, 살인자의 추악함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져 볼 수 있게 되는 것일지 모른다. 곧, 대상 안에서 현시되는 것으로 여겨지는 이념이 상상력과 오성의 자유로운 일치를 가능하게 하고, 그 대상과 내적 일치가 우연히 일치할 때 미적 판단이 발생하는 것이라면, 그러니까 미적 판단이 어디까지나 ‘일치’의 관점에서만 고찰되는 것이라면, 추한 것, 도덕적이지 않은 것 역시도 미적 판단의 대상이 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 경우 미적 판단의 발생적 원리가 이론철학과 실천철학의 두 영역을 이어줄 수 있다고 보는 데에는 다소간 무리가 따른다. 추한 것, 도덕적이지 않은 것으로부터도 쾌를 느낄 수 있게 되고, 인간의 관심이 미리부터 도덕적인 것으로 정향되어 있다고 말할 수는 없게 되기 때문이다.

 반대로 이념이 2)의 의미로 사용된다면, 칸트는 무관심한 것이어야 할 미적 판단의 근원에 이미 어떤 도덕적인 모티프를 침투시키는 것이 되어 버리지 않는가? 우리의 미적 판단에 있어 상상력과 오성의 자유로운 일치를 가능하게 해 주는 것이 도덕적인 이념뿐이라고 한다면, 도덕적인 것과 감성적인 것 사이의 가교를 놓는 것으로서의 미적 판단은 해명될 수 있겠다. 그러나 무관심한 미적 판단에서 상상력과 오성을 해방하는 것이 왜 도덕감에 부합하는 이념들 뿐이어야 하는가? 이 경우 칸트는 인간이 도덕성을 향해 방향 잡힌 존재임을 보이기 위해서, 우리가 애초에 도덕감을 통해서만 능력들을 조화롭게 작동시킬 수 있도록 프로그램되어 있다고 또 다른 독단을 펼치게 되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