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주제별 분류)/맑스주의

2. 맑스주의와 근대성의 전선: 잉여가치론과 자본의 증식

CucuClock 2023. 10. 5.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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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02. 이진경, 맑스주의와 근대성 3장 요약

 

0. 맑스의 고유한 정치경제학?

 맑스에게 고유한 정치경제학이란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는 일은 중요한데, 만일 맑스의 정치경제학이 단순히 당대의 지배적인 경제이론에서 비과학적인 것을 수정하거나 몇몇 명제를 추가한 것에 지나지 않아서, 종래의 이론 (이데올로기)들과 근본적인 단절의 지점을 마련하지 못했다면, 맑스주의 또한 근대적인 담론 혹은 이데올로기가 아닌가 하는 혐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맑스의 가장 중요한 저작들은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해 쓰였고, 그 분량만큼이나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대한 체계적인 분석을 담고 있다. 그러나 정치경제학 ‘비판’에 그치지 않고, 맑스 자신이 기성의 정치경제학, 혹은 근대의 사고논리에서 벗어나 세운 입지점이란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일반적 대답은 잉여가치론과 계급투쟁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정말 스미스나 리카도의 경제학으로부터 근본적인 단절을 이룬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이 질문을 던지는 일은, 근대성과 연관해 맑스주의를 다루려는 우리에게, 맑스가 근대적 사고논리 안에서 어떤 탈주선을 그려내었는가를 살피는 중요한 작업이라고 하겠다.[각주:1]

 

  1. 푸코의 정치경제학 비판

 맑스주의적 정치경제학이 리카도, 스미스 등의 근대적 경제학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푸코의 비판을 보자.

 《말과 사물》에서 푸코의 작업은, 한 시대의 담론들의 역사적 한계를 규정하는 무의식적 인식론적 배치로서 에피스테메를 드러내는 일이었다. 그의 세 시기 구분은 다음과 같다: 르네상스 시기 (15-16C), 고전주의 혹은 바로크 시기 (17-18C), 그리고 고유한 의미에서의 근대 (19C). 

 르네상스 에피스테메는 유사성의 에피스테메다. “장소적 인접성에 의한 적합convenientia, 유사성에 의한 모방/경쟁aemulatio, 가변성과 다가성으로 인해 보편적 적용영역을 갖게 되는 유비analogie, 사물들을 등가화시키는 위험한 힘으로서 공감sympathie.” (p.77) 호두는 뇌와 비슷하게 생겼으므로 먹으면 머리가 좋아진다, 우주와 인간은 이러저러한 유사점을 가지니 인간은 하나의 소우주와도 같다, 풍차와 거인은 커다랗다는 점에서 같다... 이런 종류의 박학érudition은 이 르네상스적 에피스테메 위에서 성립한다.

 고전주의 에피스테메는 표상représentation의 에피스테메다. 사물의 질서는 주체의 지각 혹은 표상의 질서로 환원된다. 이 표상의 질서에 어긋나는 유사성에 관한 믿음은 비이성이요 광기가 된다. 표상의 질서는 린네의 분류학에서 그렇게 되듯, 체계적이고 질서정연하게 구획되어야 하는 것이다. 거인을 잡겠다고 풍차로 돌진했던 돈키호테는 미친놈이다. 

 근대 에피스테메는 표상으로는 환원되지 않는 세계를 상정한다. 칸트가 도입한 물자체와 선험적이고 초월적인 인식능력의 체계를 떠올려 보라. 표상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던 논의는 이제 표상 자체가 가능하기 위한 조건에 관한 논의로, 표상을 가능한 것으로 만들기 위한 기능에 관한 논의로 넘어가게 된다. 언어를 통한 표상 이면에 존속하는 언어의 구조, 유기체의 수, 모양, 비율 이전에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그 유기체가 수행하는 기능... 이 같은 범주들은 그 자체로 표상으로는 환원되지 않는 객체이다.

 이 근대 에피스테메에서 정치경제학을 단순한 부의 (표상의) 분석과 구분해 주는 것은 노동 개념이다. 노동은 가치에 대한 표상이 아니라, 그러한 표상을 결정짓는 심급이다. “노동, 생명, 언어라는 이 세 가지 객체의 형식은 주관적 표상으로 환원되지 않는, 경험적이지만 동시에 선험적인 존재로서 ‘인간’의 개념을 구성한다.” (p.79) 인간학에 대한 관심은 이렇게 인간활동이라는 표상 이면에서 표상을 조건짓는 객체, 노동, 생명, 언어에 대한 관심으로 표현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인간학은 근대적이다. 

 이제 푸코를 좇아 정치경제학의 역사를 들여다보자. 세 에피스테메를 가로지르면서 부와 가치, 그리고 가치를 결정짓는 심급으로서의 노동의 관계(배치)는 어떻게 파악되고 변모하였는가? 르네상스 에피스테메의 중금주의는 화폐의 형태로 부를 축적할 것을 주장한다. 화폐는 귀금속으로서의 상품가치를 지니고, 오직 그 경우에만 구매력을 가진다. 곧, 여기에서는 “금속의 ‘귀중함’이 ‘척도’와 ‘교환’의 기초를” 이룬다. (p.80) 부와 가치의 관계는, 금속이 갖는 귀중함과 상품의 사용가치 사이의 유사성에 의해 분석된다.[각주:2] 다음으로 고전주의 에피스테메에의 중상주의에서 중요한 것은 상품 간의 교환이었다. 화폐는 그 자체로 귀중한 것이기보다, 교환을 가능하게 해 주는 매개로서 귀중한 것이 된다. 화폐는 부에 대한 표상이자 도구이다. 16세기에는 금이 소중하기 때문에 화폐로 쓰였다면, 이제 금은 화폐이기 때문에 소중하다. 화폐는 금속의 사용가치로부터 탈영토화된다. 한편 중상주의자들이 교환이 가치에 앞선다고 보았다면, 가치가 교환에 앞선다고 보았던 중농주의자들 또한 있었다. 교환가능한 가치가 있기 이전에, 그 가치 혹은 잉여는 어디로부터 왔다는 말인가? 곧, 교환가능한 가치가 있기 이전에 보수의 다양한 형태로 환원되지 않는 무엇인가가 생산되어야 하는데, 그 기원은 농업노동이다. 그러나 이들은 가치의 기원과 생산에 집중했을지언정, 여전히 자연이 제공하는 재화가 남아서 교환가능하게 될 때 부가 된다고 보았다는 점에서 고전주의 에피스테메의 안에 있다. 말하자면 고전주의 에피스테메에서 화폐란 교환가능한 상품들의 ‘표’에서, 가치들의 동일성과 차이를 규정하는 척도의 역할을 한다. 중농주의자들은 가치의 생산과 잉여에 주목했다는 점에서 가장 멀리까지 나아가기는 했지만, 그러한 부는 자연의 능력에서 기원하는 것이지 노동하고 임금을 받는 활동과는 무관하다고 보았다. 농업노동은 그저 자연의 잠재적인 생산능력을 현재화할 뿐, 그렇게 생산된 것이 가치를 갖게 되는 것은 화폐로 매개되는 교환의 단계에서이다. 고전주의 에피스테메까지 노동은 부의 생산 자체가 아니라 부의 소유나 분배로 계열화된다. 곧, 가치가 성립하는 것은 표상적인 화폐가 그 척도가 되는 교환의 수준에서이고, 따라서 노동은 가치의 생산이기보다 분배나 교환과만 관련된다.

 

 마지막으로, 근대적 에피스테메. 스미스는 화폐가 가치들의 같고 다름은 말해 주지만, 그것이 왜 같거나 다른지를 말해주지는 않는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는 상이한 상품 간에 화폐를 매개로 한 교환관계가 성립할 수 있는 것은 그것에 투입된 노동시간의 등가성에 의해서라고 쓴다. 노동은 가격이라는 표상으로 환원되지 않는, 한 상품의 교환가치의 객체적 근거다. 이제 노동이 가치의 이면에서 작용하는 원리라는 점이 분석되었으므로, 문제는 부의 교환에서 생산으로 옮겨간다. 표상적 수준에서만 분석되던 부에 어떤 인과적 차원이 접속한다.

 푸코는 이로부터 세 가지 결론을 끌어낸다. 첫째, “경제는 이제 ‘동일성과 차이의 동시적 공간’에서 벗어나 기원과 역사를 갖는 ‘계기적 생산의 시간’과 결부된다.” 둘째, 가치의 이면적 원리를 규명할 수 있게 된 결과 경제는 희소성과 결핍 위에서 성립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노동, 인간의 유한성으로 하여서 경제학은 인간학의 영역으로 들어가게 된다.[각주:3] 셋째, ‘역사의 부동화.’ 리카도는 자본이 축적되고 진화하면 이윤율이 저하되어 역사적 진화가 언젠가 멈추리라고 보았다. 역사가 마침내 움직이지 않게 되고, “인간의 유한성이 무한한 시간의 관점에서 명확하게 규정되기에 이른다.” (p.84) 맑스는 리카도가 분석을 멈추는 지점에서 혁명이 일어나리라는 약속을 하고는 있지만, 인간의 유한성과 역사의 종말이라는 주제를 충실히 따라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이유에서 푸코가 보기에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은 근대적 에피스테메를 넘어서는 데 실패하고 있으며, 풀장 속의 폭풍과도 같은 것이었다. 

 

2.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

2-1. 노동가치론

 앞서 보았듯, 노동이 교환되는 상품의 가치를 결정한다는 노동가치론은 스미스, 리카도, 맑스에서 모두 발견되는 듯 보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노동가치론을 받아들이는가 그렇지 않은가는 맑스주의인가 아닌가를 가르는 가장 중요한 잣대 가운데 하나로 여겨지는 듯하다. 그러나 “고전적인 경제학과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 사이에는 결코 정치경제학으로 환원할 수 없는 근본적인 단절”이 있다. (p.85) 맑스는 노동가치 개념에 대한 최초의 근본적인 비판자였다. 어떠한 지점에서 그러한가? 

 스미스와 리카도의 노동가치론이 기대고 있는 공리는 다음과 같다.

 

a) 모든 상품은 가치에 따라 교환된다. 즉 모든 교환은 등가교환이다. (가치론의 기본전제)

b) 모든 상품의 가치는 그것을 생산하는 데 투여된 노동시간에 의해 결정된다. 즉 노동(시간)이 가치의 척도다. (스미스가 추가)

c) 가치는 노동에 의해서만 생산된다. 즉 가치의 기원은 노동이다. (리카도가 추가) 

 

 맑스는 여기에서 고전경제학이 봉착하는 딜레마를 본다. 맑스가 파악하기를 자본은 ‘자기증식하는 가치’인데, 위의 공리들은 이 자본의 개념을 구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대로라면 자본주의의 본질을 규명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에 따라 맑스가 내놓는 새로운 공리들은 다음과 같다. 

 

1) 노동은 가치를 갖지 않는다.

2) 노동은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질적인) 사용가치다.

3) 노동력을 사용하여 생산하는 가치량은 그 구입에 지출된 가치량과 무관하다 (물론 가치의 증식이 발생하려면 전자가 후자보다 커야 한다). 

 

 여기에서 확인되는 것은 노동과 노동력의 구분 (1)과 2)), 노동의 가치와 노동력의 가치의 구분 (3))이다. 노동은 노동력의 질적인 사용가치를 말한다. 한편 노동력을 통해 산출되는 가치는 양적인 것이다. “노동이 질 (사용가치)에 관한 것이라면, 노동력은 양 (교환가치)에 관한 것이다.” (p.88) 베르그송이 말했듯, 양으로부터 질은 도출되지 않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질적인 차원인 노동으로부터 양적인 가치가 도출될 수는 없다. 노동은 가치의 기원이 아니다.[각주:4] 그렇다면 이제 가치의 기원은 무엇인가가 문제되겠지만, 맑스의 질문은 이것이 아니다. 그는 가치의 증식, 그리고 그 증식된 가치의 원천에 관심이 있다. 스미스, 리카도 등은 잉여가치의 크기를 규정하는 원인 (노동시간)을 탐구했지 그것이 어째서 자기증식하는지를 설명하지 않았다 (맑스가 파악한 ‘자본’ 개념을 생각해 보라). “사실 이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잉여가치의 기원이라는 절실한 문제를 지나치게 깊이 탐구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는 것을 정당하게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이때 잉여가치의 원천을 찾는 작업은 계보학적 비판의 양상을 띤다. 맑스가 분석하기를, 자본의 자기증식은 “본원적 자본이라는 동질적인 기원이 아니라 잉여가치라는 이질적 혈통을” 갖기 때문이다. (p.89) 자본 외부의 어떤 것에 의해 증식하게 되는 자본의 원리를 규명하기, 이것이 증식이 (우연히, 이질적인 것과의 만남을 통해) 발생하게 되는 외부성의 요소가 개입하는 지점이다. 

 맑스는 노동이란 노동자와 자연과의 생산적인 대사과정이라는 정의에서 다시 출발한다. 노동은 이처럼 본래 질적인 과정이다 (노동과정). 그리고 나서 맑스는 노동을 양적인 가치로 변환하는 가치화과정Verwertung을 이것과 구분한다. 이 계열에서 문제는 노동력을 구입하는 데 지출된 가치량과 노동력을 투입해서 나오는 결과물의 가치량 사이의 비교이다. 이때 양자의 가치는 서로 다르다. 곧, 노동력을 유지하는 비용 (노동력 구입의 가치량)과 노동력이 생산해 낸 서로 구분되는 별개의 양이다. 이 차이가 잉여가치이다. “자본가치의 증식은 잉여가치에 의해 결정된다.” (p.90) 이것을 명제 S라고 하자. 

 명제 S를 받아들일 때, 고전경제학의 공리계는 무너진다. 먼저 명제 S는 a)에 반대하여 어떤 부등가교환을 증언한다. 그러나 S 없이는 스스로 증식하는 자본의 개념을 설명할 수 없으므로 고전경제학에 필수적인 명제이다. 고전경제학은 따라서 명제 S를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게 되고 따라서 해체된다. 이렇게 하여 명제 S는 매우 기묘한 위치를 점하게 된다. 명제 S는 고전경제학 (자본주의 경제학)에 내재하는 이율배반, 그리고 잉여가치의 외부성에 대한 폭로를 담당한다. 맑스는 다름아니라 이로부터 명제 S를 품을 수 있는 새로운 공리계를 구성해 내는 것이다.

 

2-2. 자본증식의 이율배반

 힐베르트는 유클리드의 《기하학 원론》에서 생기는 오류들이, 유클리드가 ‘점’, ‘선’, ‘면’ 따위의 친숙한 용어들을 사용하여 알게모르게 자신의 직관을 개입시켰기 때문이라고 보았고, 직관적인 내용을 모두 제거한 형식적인 요소들로만 수학을 다룰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언제라도 점, 직선, 평면이란 말 대신에 (X, Y, Z 같이, 그 기호가 무엇이든지) 점, 테이블, 의자, 맥주잔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p.92) 이 입장은 후에 형식주의로 발전하여 형식적인 공리적 방법을 통해 독립성, 완전성, 무모순성을 갖춘 체계를 구성하려는 시도로 이어졌다. 곧, 한 공리를 다른 공리 안에서 증명할 수 없고 (독립성), 다른 공리들을 끌어옴이 없이 제시된 공리들만으로 어떤 명제의 참과 거짓을 결정할 수 있으며 (완전성=내적 완결성, 폐쇄성), 그 공리들이 서로 모순되지 않는 (무모순성) 공리계를 구성하려는 시도.

 이 시도는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로 인해 무너지고 만다. 그 결론은 다음의 두 가지였다. 

 

1) 자연수 체계를 포함하는 모든 무모순인 형식적 체계에 결정불가능한 명제가 존재한다. 즉 무모순인 형식 체계에는 참도 거짓도 증명할 수 없는 명제가 존재한다.

2) 자연수 체계를 포함하는 모든 무모순인 형식적 체계 안에서 그것의 무모순성을 증명할 수 없다.

 

 이것이 일러주는 바는 무엇인가? ‘완전성’의 요건이 원리상 만족될 수 없으며, 완전성을 담보하려면 항상 어떤 공리계 밖의 요소를 도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정치경제학의 노동가치론 공리계에 대해 명제 S가 체계 안에서 증명불가능한 명제인 것은 아닐까? 따라서 이 공리계는 명제 S를 채택할 수도, 채택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정치경제학에서 가장 중심적인 현상인 자본의 증식을 해명하기 위해서는 명제 S가 필요하다. 곧, 명제 S는 공리계에 내재적이어야 한다. 맑스의 새로운 공리계는 이렇게 하여 명제 S를 포섭하여 그것을 가치론의 공리계에 부합하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한 공리계가 완전하지 않아서 다른 공리를 추가하더라도, 그 공리계는 여전히 완전하지 않을 것이다. 곧, 맑스의 공리계도 어느 지점에서 어떤 외부성의 요소를 요청하게 되며 붕괴하는 지점이 올 것이다. 명제 S를 포섭한 맑스의 공리계는 자본 증식의 이율배반을 가리킨다. 이것은 가치론의 공리계가 넘어설 수 없는 고유한 경계요 한계이다.
 이 이율배반은 ‘넘어서는 안 되는 경계’라는 의미의 칸트적 이율배반과는 다르다.[각주:5] 먼저, 칸트적 이율배반이 이성이 경험가능한 영역을 벗어나면서 생기는 ‘조건적이고 외적인 한계’라면, 괴델과 맑스가 말하는 이율배반은 공리계에 내적인 것이다. 칸트적 이율배반은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안전한 영역을 구획하는 반면, 괴델의 자연수 체계, 맑스의 가치론 공리계는 이미 그 안에 어떤 한계를 품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다음으로 칸트적 이율배반이 결코 넘어서는 안 될 선과도 같이 이해되었다면, 맑스적 이율배반은 세계를 변혁하기 위해 기필코 넘어서야 했던 경계이다. 이렇게 자본 자체에 이율배반이 내재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자본과 짝을 이루는 노동 안에도 어떤 이율배반이 있는 것은 아닐까? 따라서 이 한계의 성격을 검토하고 그것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자본에 새겨진 노동의 흔적만큼 노동에 새겨진 자본의 흔적을 또한 살펴야 할 것 같다. 

 

 

2-3. 잉여가치의 외부성

 잉여가치는 노동력의 유지를 위한 비용과 결과물의 가치 사이에 성립하는 가치의 양적 차이이다. 맑스는 이것을 m으로 표시한다. 이때 앞서 살폈듯 잉여가치 개념은 (고전경제학, 그리고 맑스의) 가치론 공리계에 대해 외부적이다 (잉여가치의 외부성). 맑스는 이 점에서 리카도를 비판하는데, 그가 잉여가치를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내적인 것으로 파악했다는 것이다. 맑스가 보기에 잉여가치는 가치법칙과 무관한 외적 강제가 있어야 발생한다. 여가시간을 타인을 위한 잉여노동의 시간으로 전환시키려면 어떤 강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잉여가치의 외부성에 대한 맑스의 이론적/역사적 증명을 보자.

 첫째로 이론적 증명이다. 노동력의 재생산비용=v, 결과물의 가치=w라고 하자. 이때 m=w-v. w의 크기를 결정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노동시간과 강도, 노동의 조직 방식이다. 그런데 앞서 보았듯 노동은 노동력의 질적인 사용가치이므로, 가치법칙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다. 노동시간은 노동력 구매를 위해 지출한 비용과는 관계없이 (노동자의 생명을 보존하는 한에서) 자본가가 마음대로 (혹은 사회적 관습과 법, 노동자의 저항에 의해서) 결정할 수 있는 것이다. 노동의 강도 또한 마찬가지여서, 노동력의 구매 비용과는 상관없이 자본가의 의지와 노동자의 저항에 의해 정해진다. 노동이 조직되는 방식 역시 가치론의 공리계에 이미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 노동력의 구매 비용과는 상관없는 외부적 요인에 의한 것이다. 따라서, w는 가치론의 공리계에 외부적이다. 

 한편, v 역시 가치법칙에 외부적이다. v는 정의상 노동력 재생산에 필요한 시간이지만, “그 구체적인 크기는 나라와 사회마다 상이한 사회적 평균 비용에 의해 규정된다.” (pp.104-105) (기후, 문화, 자연적 특성, 문화수준 등. 예컨대 70년대 한국의 임금은 중학교 수준의 교육비만을 포함했겠으나, 현재의 경우 대학 수준의 교육비까지를 포함한다.) 이 외부적 요인들은 가치론의 공리계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 따라서 w와 v 모두 가치론의 공리계에 외부적이므로, 잉여가치 m 또한 가치론의 공리계 밖에 있다. 

 다음으로 역사적 증명이다. 노동시간의 경우, 19세기 중반 영국 노동법의 역사가 보여주듯, 가치법칙의 내재적 원리가 아니라 국가의 법,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계급투쟁, 외부적 권력 등에 의해 결정되었다. 노동시간의 증감에 따른 임금의 증감도 가치법칙에 따른 것은 아니었다. 노동시간 1시간 단축에 따른 임금의 감소폭은 어떨 때는 8.5%이기도, 15%이기도 했던 것이다. 노동강도와 노동생산력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여서, 예컨대 기계의 리듬에 맞춘 규칙적인 작업은 노동력의 구매비용과는 무관하게 노동자에게 강제된다. 자본가는 노동자가 견딜 수 있는 최대한의 노동강도를 도입하고, 노동자를 그것을 견딜 수 있는 존재로 만들기 위해 자의적으로 임금을 늘리거나 줄인다. 이것은 “단지 지불되는 가치량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의지대로 잉여가치를 생산할 수 있는, 그 어떤 외부적 강제에도 복종할 수 있는 노동자로 만드는 것이다.” (p.108) 따라서 이론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m을 결정하는 w와 v는 가치론의 공리계 밖에 있는, 노동의 질적 요소들에 의해 결정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가치론의 공리계가 잉여가치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비-가치적 장치나 제도로부터 오는) 잉여가치가 교환가능한 가치를 규율하는 공리계에 영향을 준다.

 사정이 이러하므로 자본가들은 노동의 재생산을 위한 비용을 떨어뜨리기 위해 애쓴다. m에서 결정적인 것은 v를 최대화하고 w를 최소화하려는 자본가의 노력, 그리고 w를 극대화하기 위한 희생을 줄이고 v를 최대한으로 확보하려는 노동자의 노력이다. 이렇게 볼 때 잉여가치 개념을 이루는 각각의 항에는 계급간의 투쟁이 얼마간 계기로서 포함되어 있다고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w와 v를 가치론의 공리계 내부의 것으로 보려는 입장은, 잉여가치의 외부성을 무시하고 계급투쟁을 임금을 둘러싼 양적 투쟁으로 이해하도록 만드는 위험이 있는 것이다. 맑스가 파악하기를, 잉여가치야말로 고전경제학적 공리계가 파열하는 지점이며 정치경제학 비판에 있어 가장 근본적인 전선이다.

 

2-4. 자본 축적의 외부성

 자본의 축적이란, 자본에 의한 자본 자신의 축적과 증식을 말한다. 이것은 자본 자신이 몸집을 불리는 반자동적인 과정인 한편, 자본가의 입장에서는 경쟁 속에서 이윤을 소비하기보다 추가 자본으로 돌리기를 선택하게 만드는 유인으로 이해되었다. 베버는 이것의 기원을 프로테스탄티즘의 ‘절제되고 합리적인’ 생활태도로 설명한 바 있다.

 그러나 자본 축적에 대한 이 같은 이해에 반대하여서, 맑스는 자본주의적 축적의 절대적 일반법칙이 “축적이 진행됨에 따라 실업자와 과잉인구가 많아지는 법칙, 즉 상대적 과잉인구의 법칙”이라고 쓴다. 이것은 자본의 축적 자체도 가치론의 공리계 밖의 어떤 외부성이라는 맑스의 관점을 대변한다. 곧, “가치론의 공리계에 대한 자본 축적의 외부성.” 자본주의적 축적은 자본 자체에 대해 외부적이다. (p.115)

 이것을 보이기 위해 먼저 맑스는 자본이 기원으로 돌아갈 가능성을 봉쇄한다. 자본의 축적을 자본이 그 내적 원리에 의해 자본을 낳는 과정으로 파악하자면, 한 자본은 그 이전의 자본이 낳은 것이고, 그 자본은 또 그 이전의 자본이 낳은 것이고... 하는 의미 없는 연쇄가 계속될 것이다. 맑스는 이 추가적 자본이 자본 내적인 원리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가치론의 공리계 밖에 있는 잉여가치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곧, 축적=자본화된 잉여가치. 그러나 여전히, 축적을 위한 최초의 자본이 어디에서 왔는가 하는 질문이 남는다. 정치경제학자들은 그것이 자연과의 교섭, 즉 노동으로부터 왔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에 대한 맑스의 비판을 보자. 첫째, 축적이 계속되면서 자본화된 잉여가치에 비해 최초의 자본의 양은 무한소에 가까울 것이다. 둘째, 본원적 자본은 재산의 폭력적 수탈, 직접생산자로부터의 생산수단 수탈로 이루어진 것이다. (?????) “여기서 기원의 가치는 질적으로, 도덕적으로 무화된다. 요컨대, 자본의 축적은 자본 자체의 기원을 갖지 않는다.” (p.116)

 다음으로 맑스는 축적의 과정 자체도 외부적임을 보인다. 자본의 구성=가변자본과 불변자본의 비율이라고 할 때, 이 값이 일정하다면 자본이 축적될 때 노동력에 대한 수요가 증가할 것이고, 따라서 임금이 증가할 것이다. 이때 임금 지출이 늘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가변자본을 불변자본으로 전환해야 할 것이다. 이것을 ‘유기적 구성의 상승’이라고 부른다. 이 상승의 결과로 실업자가 증가하고, 프롤레타리아가 증식한다. 자본의 축적에 따라 실업 인구, 상대적 과잉인구가 만들어진다. 따라서 자본의 축적 법칙 = 상대적 과잉인구의 인구법칙.

 자본의 증식은 상대적 과잉인구를 만들어내면서 임금의 상승을 막는다 (임금을 저하시킨다). 높아진 임금을 지불하기보다는, 더 효율 좋은 기계를 도입하여 상대적 과잉인구를 만들고 임금이 저하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노동력의 상품가치가 저하되면서 노동자의 힘은 무력화되고, 상품이 대대적으로 탈가치화되면서 불가피하게 공황이 발생한다.[각주:6] 자본 축적의 외부성은 이렇게 자본의 내적 원리 바깥에 있으면서도 자본 축적의 원리를 규정한다. 자본은 원리상 내적인 축적의 한계를 갖지만, 이 같은 유기적 상승을 통해 그 내적인 경계를 끊임없이 넘어선다. “자본은 언제나 그 경계를 넘으면서 존재하며, 넘어야만 존속할 수 있다.” (p.119)

 

4. 근대 비판으로서 정치경제학 비판

 맑스가 그의 ‘정치경제학 비판’을 통해 비판하고자 했던 것은 가치론에 기초하고 있는 정치경제학 전체다. 이러한 의미에서 《자본》은 자본에 대한 분석을 통한 비판, 그리고 정치경제학에 대한 비판이다. 

 자본에 대한 분석에서 맑스는 자본의 생리를 긍정적으로 분석할 뿐 부정적으로 비판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주목할 점은 그러게 분석된 자본의 배치가 언제나 부정적 결과로 이어진다는 점이다.[각주:7] 정치경제학 비판은 부정적 비판의 양상을 띤다. 정치경제학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 자본의 기원과 축적의 원리를 폭로하는 계보학적 비판. 본원적 자본의 축적은 공동소유물과 생산수단의 수탈로부터 성립했으며 그 축적의 원리는 노동력과 상품의 탈가치화를 부추긴다는 분석. 

 

 이제 맑스가 기원의 관념, 희소성의 관념, 유한성 내지 역사의 종말이라는 근대성의 에피스테메를 벗어나지 못했고, 따라서 스미스나 리카도가 마련한 정치경제학으로부터 완전히 놓여나는 데 실패했다는 푸코의 비판으로 돌아가자. (곧, 맑스의 노동가치론은 표상 이면의 차원에서 상품가격을 결정하는 요소를 단지 드러내기만 했고, 따라서 스미스, 리카도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는가를 재차 검토해 보자.)

 먼저, 기원의 문제를 보자. 스미스와 리카도의 노동가치론은 가치의 기원을 노동으로 파악했다. 반면 맑스에게 노동은 표상 이면의 객체이기보다는 노동력의 사용가치, 노동하는 자와 자연 사이의 질적인 대사과정으로 파악된다. 노동은 가치의 기원이 아니다. 이에 더해 맑스는 이 문제에 그리 마음을 쓰지도 않았던 것 같다. 그는 가치의 원천을 다룰 때 그 가치가 고전적 가치론의 공리계 외부에서 연원한다는 점을 보이기 위해서 그렇게 했던 것이다. “따라서 맑스의 노동 개념은 기원의 관념과는 거리가 멀고, 차라리 그것에 대한 비판적 위상을 갖는다.” (p.124)

 다음으로 희소성의 관념을 보자. 정치경제학이 재화의 희소성과 인구의 과잉에서 경제학의 역할을 봤다면, 맑스는 재화의 희소성과 인구의 과잉이[각주:8] 자본 축적의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라고 본다. 마지막으로 역사와 종말의 문제. 자본주의의 한계나 유한성은 자본이 존속하기 위해, 외적인 요소를 통해 넘어서야 할 내적 경계이지 근대적 역사관의 종말적 한계가 아니다. 이윤율 저하의 법칙은 그것을 상쇄하는 요인으로 하여서 그 자신을 넘어선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푸코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맑스주의가 “근대의 무의식적인 인식론적 배치를 넘어서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p.125)

 

 맑스는 정치경제학 비판에서 고전적 정치경제학의 공리계가 포함하지 않지만 그것에 의존하고 있는 어떤 외부성 (잉여가치론)을 드러냄으로써 자본의 원리 자체에 내재하는 이율배반과 계급투쟁의 모티브를 드러낸다. 그리고 맑스주의 정치경제학은 이제 새로운 가치론을 과학화하기 위해 잉여가치를 설명하는 공리를 도입한다. 그러나 여전히, 이 공리계 역시 어떤 외부성에 의존하고 있는 듯 보인다. 이 새로운 가치화/가치증식의 외부성으로 도입되는 것이 바로 상품과 노동력의 탈가치화와 과잉인구에 대한 논의이다. 물론 이 외부성 역시 종래에는 축적론, 공황론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공리계에 포섭된다. 그런데 이러한 맑스주의의 저변 확대는 결국 또 다른 근대적, 과학적 정치경제학을 낳으려는 시도가 되어 버리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가운데 근대를 진정으로 초극하기 위해서는 맑스주의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 것일까? 맑스가 근대 에피스테메를 잠시나마 벗어난 이 공간을 새로운 운동과 창조의 장으로 변환시키기 위해서는, 근대를 넘어서는 사유의 요소들을 다시 확인하고 새로운 변이의 선을 그려 새로운 형상으로 구성할 것이 요청되는 것은 아닐까? 

  1.  이를테면 에티엔 발리바르 등은 정치경제학 비판과 정치경제학의 문제설정을 구별하면서, 전자가 후자로 환원될 수 없음을 보이고자 했다. 한편 잉여가치와 계급투쟁은 모호하게나마 리카도의 경제학에 들어 있다는 의견이 있기도 하여, 그 둘 간의 경계를 설정하는 일이 문제가 되기도 했다. 이 지점에서 맑스 철학의 고유한 영역을 드러내는 작업은 그가 근대성과 어떻게 대결하였는가 하는 문제를 다루는 데 중요하게 되는 것이다.  [본문으로]
  2.  노동에 대한 분석은 여기에서 등장하지도 않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라. [본문으로]
  3.  본문에서는 투여된 노동의 양이 상품의 교환가치로 이어진다는 분석으로부터 경제가 희소성과 결핍 위에서 성립한다는 분석으로의 연결고리는 분명히 드러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 점은 몇 가지 전제들을 끼워넣음으로서 어렵지 않게 추론할 수 있다. 1) 가치의 이면에서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노동이다. 2) 원용할 수 있는 노동의 양은 무한하지 않다. 가치를 생산하는 원천인 노동은 유한하며 희소하다. 혹은, 인간은 유한하므로 인간이 노동에 투여할 수 있는 시간과 힘에는 한계가 있다. 노동은 어떤 의미에서 “생명이 죽음과 직면하는 위험지대”에 있다. (p.83) 3) 따라서 교환가치는 희소성과 결핍 위에서 성립하며, 달리 말해 인간의 유한성 위에서 성립한다. 이렇게 하여 경제학의 관심은 인간의 유한성에 관한 관심과 엮이게 되고, 경제학은 인간과학의 영역으로 들어선다.  [본문으로]
  4.  이렇게 보면 2)를 인정할 때 1)도 자연스럽게 따라나오는 듯 보인다. [본문으로]
  5.  칸트적 이율배반이란, 경험의 영역을 넘어서서 제시되는 명제들에 관하여서는 우리 이성의 통일성이 담보될 수 없고, 따라서 그러한 명제들은 참과 거짓이 결정될 수 없는 공허한 명제들이라는 것을 말한다.  [본문으로]
  6.  상대적 과잉인구로 하여서 상품이 탈가치화되는 과정에 대한 설명은 본문에 없다. 추측컨대, 노동력의 상품가치 저하 -> 노동자들의 구매력 저하 -> 상품에 대한 수요 감소 -> 상품가격의 저하 (상품의 탈가치화). [본문으로]
  7.  상품과 화폐에 대한 분석은 물신성으로, 절대적 잉여가치에 대한 분석은 노동일을 둘러싼 투쟁으로, 상대적 잉여가치에 대한 분석은 노동자의 삶의 변형으로, 자본 축적의 일반법칙은 과잉인구로... [본문으로]
  8.  상품의 희소성=가변자본 비율의 감소, 인구 증가 = 상대적 과잉인구의 발생으로 이해하면 적절할까?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