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주제별 분류)/맑스주의

1. 맑스주의와 근대철학 사이의 딜레마

CucuClock 2023. 10. 2.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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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주의와 근대철학 사이의 딜레마

2023.10.01. 이진경, 맑스주의와 근대성 2장 요약

 

 맑스주의에 대한 공부를 시작한다. 오늘날 사회의 운동성은 우리 자신의 힘이나 정서의 움직임이기보다는 돈과 물자가 흐르는 속도로 이해되고, 사건들은 언제나 잘 정리된 제도나 제한시간 안에 이루어지는 합리적 의견 교환을 통해서만 일어날 수 있게 된 듯 보인다. 변화가 있기 전에 먼저 ‘좋은 시민’일 것을 요구하는 잘 정돈된 사회는 더 이상 어떤 충격으로서밖에 시작될 수 없는 변화를 받아들일 수 없다. 이러한 세태는 1) 합리적 의사소통을 통해 어떤 방식으로든 어떤 합의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가정, 그리고 2) 합리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제기되는 논제들은 변화로 이어질 수 없다는 편견에 의한 것이 아닐까? 이렇게 하여 파이프 속의 물은 언제나 한 방향으로 흐를 것을 강요받고, 물이 새는 공간은 재빠르게 보수되거나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무시되고 만다. 사건성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아직 근대성의 후손이다 (혹은 다시금 근대성의 후손으로 되돌아온 것 같다). 교육은 좋은 시민, 좋은 기술자를 길러내기 위해 조직되지 도주자를 위해 조직되지 않는다. 제도와 의사전달의 채널은 의견들의 관리 가능성을 위해 조직되지 어떤 파열, 극적인 지점들을 위해 조직되지 않는다. 요소 하나가 바뀌면 전체의 본성이 바뀌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사회는 하나의 거대한 수적 다양체가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얼마나 말 될 수 없는 것의 후손이기도 한가. 진리는 얼마나 원한다고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을 입증해 보여야 하는 것이기도 한가. 얼마나 많은 것이 보이지 않는 가장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결심으로 말미암아 시작되는가. 채널 속에서 흐르지 못하고 단지 부유하는 답답함과 둔함이 있을 곳은 어디인가. 단지 있을 뿐인가? 지금껏 있었던 근대성과의 대결을 살펴보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 중요하다. 누가 어떻게 근대성과 어떤 개념으로 대결하고자 했는가? 근대성의 논리는 그것을 어떻게 다시 삼켜 버렸는가?

 이러한 이유에서 이번 학기 안에 이진경, <맑스주의와 근대성>을 아래와 같은 형태로 요약해 남길 생각이다. 이 책은 맑스주의의 사상적 흐름을 주제별로, 연대기순으로 짚는 책인 동시에, 2장까지밖에 읽지 않은 지금의 상황만을 보더라도 들뢰즈주의적인 용어법이 두드러지는 책이다. 동시에 글쓴이 자신이 80-90년대 사회주의 혁명투쟁을 그렸던 운동가이기도 하다. 마르크스에 대한 ‘정통 해석’은 아닐지언정 (모름) 그것이 무슨 문제인가? 부족한 이론적 이해는 지금이든 나중이든 보충하면 될 일이고, 지금 문제는 블랙홀처럼 모든 것을 삼켜 버리는 근대성의 논리와 대결하려는 어떤 시도가 있었고, 그것을 이 운동가-저자가 어떻게 읽어내고 있으며, 우리 자신의 역사에 그 흔적이 어떻게 기입되어 있는가를 짚어낼 수 있게 되는 일이겠다. 나로서는 철학사 공부가 언제나 재료 모으기, 사유 속으로 들어가 그 사유를 흔들어놓기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한 점에서 대강의 맥을 짚으면서도 이런저런 관점들이 알게모르게 얼룩덜룩 섞여 있는 이 책은 나에게 맑스주의의 미로로 들어가는 좋은 입구가 되어 주리라고 생각한다. 

 

0. 근대철학의 경향

 근대철학은 데카르트가 인식주체와 진리를 분리하면서 시작되었다. 곧, 근대철학의 기획은 미리 주어진 주체가 있고, 신으로부터 독립된 주체가 자기 힘으로 어떤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출발한다. 완전무결한 진리에 대한 관심은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알게 되는가 하는 인식론을 철학의 중심 영역으로 만들었고, 철학은 과학적 지식의 기초를 확고히 하는 시녀 역할을 자처하게 되었다. 여기에서는 진리가 인식의 목표이자 실천의 기준이다. 따라서 이 시기에 또한 진리에 이르지 못한 이들을 꿈에서 깨도록 만들어야 할 바, 계몽주의가 대두하기도 했던 것이다.

 이때 진리를 구하는 인식의 활동은 정적이고 피동적인 자연을 대상으로 하는, 주체의 능동적인 작용에 의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렇게 하여 인식해야 할 대상과 주체 사이의 거리가 도입된다. 그러나 이때 주체와 객체를 이렇게 나누었을 때 주체의 인식이 실재의 인식과 어떻게 일치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여전히 남는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바로 근대철학의 관심이자 과제였다.

 

  1. 맑스가 도입한 철학적 전회들

 맑스가 근대철학의 이 문제의식을 전복한 것은 ‘실천’ 개념을 통해서였다. 먼저 맑스는 대상이 정적으로만 파악될 것이 아니라 실천으로서 파악되어야 하고, 따라서 감성적 지각 역시도 실천으로 파악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제까지의 모든 유물론(포이에르바하의 것을 포함하여)의 주된 결함은 대상, 현실(Wirklichkeit), 감성(Sinnlichkeit)이 단지 '객체 또는 관조(Anschauung)'의 형식 하에서만 파악되고, '감성적인 인간 활동, 즉 실천'으로서, 주체적으로 파악되지 못한다는 점이다.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 1)

포이에르바하는 '추상적 사유'에 만족하지 않고 '직관(Anschauung)'에 호소한다. 그러나 그는 감성을 '실천적인' 인간적·감성적 활동으로는 파악하지 못했다. (테제 5)

 

 이로부터 맑스는 또한, 대상에 관한 우리의 사유가 진리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이론적이기보다 실천적이며, 환경의 변화와 인간 활동의 일치 또한 ‘혁명적 실천’으로서만 파악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인간의 사유가 대상적 진리를 포착할 수 있는지 여부의 문제는 결코 이론적인 문제가 아니라 '실천적인' 문제이다. (테제 2)

환경의 변혁과 인간 활동 혹은 자기변혁의 일치는 오직 '혁명적 실천'으로서만 파악될 수 있으며, 또 합리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테제 3)

 

 요컨대, 실천 개념을 중심으로 맑스는 1) 대상, 2) 감성적 직관, 3) 진리, 4) 윤리에 관한 근대적 관점을 뒤집고 있는 것이다. 

 

1-1. 대상

 맑스에 이르러 대상은 더 이상 객체로서만 파악되지 않는다. 대상은 현실적 실천과정의 산물로서 파악되어야 한다. 대상은 실천하는 자, 그리고 그 주변의 환경과 특정한 양상을 이루며 어떤 계열série을 형성한다. 한 건물이 호텔 건물로 쓰일 수도, 박물관으로 쓰일 수도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라. 이 건물은 그 안에 들락거리는 사람들, 그 안에 갖추어지는 시설들과 계열을 이루며 특정한 용도를 갖게 된다. 이때 이 같은 계열화는 건물 자체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한계 안에서 이루어지기는 하지만, 대상의 의미가 그 고유한 한계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은 아님이 분명하다.

 

1-2. 지각, 감각

 근대적 주체는 인식주체의 감각이 어떻게 실재를 정확히 (수동적으로) 모사해 내는가에 주목했다. 그러나 맑스에게 인식주체의 감각은 실천적 활동 속에서 선택적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자명하게 의미가 결정된 사물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는 작용은 없다. 주체는 실천적 활동 속에서 지각하고, 사고하며 판단한다. 지각 속에서 항들은 실천적 맥락에 의해 계열화된다. 빵을 훔치는 사람을 빵집 주인은 도둑으로 지각하고 경찰, 수갑, 감옥과 계열화한다. 한편 배고픈 사람에게 그 사람은 배고픔, 부러움, 용감함 등으로 계열화될 것이다. 근대의 존재론, 인식론에서 찾던 동떨어진 주체란 없다. 인간은 ‘사회적 관계의 총체’라는 새로운 정의를 얻게 된다.

 

1-3. 진리

 무엇이 진리인가 하는 문제는 이론적으로 증명될 수 없는 문제이다. 오직 실천 속에서 지식의 현실성, 힘, 차안성을 증명하는 것만이 문제이다. 더불어 1-1, 1-2에서 논했듯 어떤 지식이 참인지 아닌지는 다른 항들과의 계열 속에서 파악될 일이다. 진리란 실천적 맥락 속에서 이루어지는 특정한 계열 안에서 반복적 진리효과를 통해 타당성을 얻는 지식이다. 곧, 어떤 계열 S를 구성하는 데 그 지식이 필수적이라면, 그 지식은 계열 S 안에서 진리이다. 따라서 이제 철학의 문제 설정도 완전히 변모한다. 철학은 완전무결한 지식을 구하고 그것을 정당화하는 작업이기보다, 인간적 실천과 이 실천의 이해 속에서 그 합리적 해결을 얻는 활동이 된다. 곧, 어떤 계열 안에서 필수적이고, 그 안에서 이론적이기보다는 실천적으로 입증되는 힘으로서의 지식.

 

모든 사회적 생활은 본질적으로는 '실천적'이다. 이론을 신비주의(Mystizism〔us〕)로 유도하는 모든 신비는 인간적 실천 속에서, 그리고 이러한 실천의 개념적 파악 속에서 그 합리적 해결책을 찾아낸다. (테제 8)

 

1-4. 윤리

 모든 비판적 활동, 철학적 활동의 기초는 혁명적 실천이다. 맑스의 실천철학은 근대 윤리학의 핵심이었던 계몽의 아이디어와도 갈라선다. 계몽은 무지한 대중과 계몽하는 스승을 요청한다. 그러나 이것은 “환경이 바로 사람에 의해 변화된다는 것과 교육자 자신이 교육받아야 한다는 것을 망각”한 결과이다. 환경의 변화와 인간 행위의 변화가 일치하려면 혁명적 실천이 있어야 할 뿐이다. 이 관점에서 볼 때 계몽주의는 완결된 세계관을 전제하고, 그것이 이루는 계열화의 방식을 반복할 뿐이다. 

 

 맑스는 이렇게 하여 실천 개념을 중심으로 대상, 지각, 진리, 윤리를 새롭게 바라본다. 철학의 주제는 이제 어떤 물질적 생산방식이, 주체를 어떻게 구성하는가 하는 문제가 된다. 이 문제를 다룰 수 있게 하는 새로운 이론적 지대를 흔히 역사유물론이라고 부른다. 

 

2. 맑스주의의 근대철학으로의 회귀

 19세기 후반, 거대한 규모의 사상들이 으레 그러하듯이 맑스의 사상도 하나의 체계를 이루기 시작한다. 본래 ‘맑스주의’라는 말은 무정부주의자들의 비아냥에서 시작되었으나, 플레하노프 등의 노력으로 당시의 맑스주의자들에 의해 다시 전유되었다. 이 과정에서 맑스주의는 과학주의의 색채를 띠면서 점차 근대적 문제의식으로 돌아가려는 듯 보였다.

 먼저, 다른 사람들의 동의를 얻기 위해 맑스주의는 ‘과학적 이론’처럼 보여야 했다. 대중뿐 아니라 대중운동의 지도자나 지식인들을 설득하기 위해 맑스주의는 당시 가장 유력한 과학적 모델이었던 다윈주의의 모습을 빌려 진화론적인 방식으로 해석되어야 했던 것이다. 한편, 이러한 정치적인 목적과는 무관하게, 과학주의란 맑스주의가 깔끔히 떨어낼 수 없는 시대적인 한계였는지도 모르겠다. 엥겔스는 변증법을 외부세계와 인간 사유 사이의 운동법칙에 대한 과학으로 규정하고 ‘자연변증법’으로 자연의 운동법칙을 설명하려고 했다. 그가 보기에 철학의 영역에 남을 것은 사유와 법칙에 대한 학문으로서의 논리학과 변증법뿐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실증과학으로 귀착될 것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그는 실천을 통해 이론을 검증하고 망상을 극복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 과정은 인식과 대상이 일치하는 문제에 천착했던 근대적 문제설정과, 그리고 가설 수립과 검증을 통해 객관적 진리에 도달하려는 과학주의적 견해와 맞닿아 있다. 맑스주의에 대한 이러한 이해로 말미암아 물질과 의식, 존재와 사유, 대상과 주체의 범주가 부활한다. 엥겔스 이후에 이렇게 하여 맑스주의의 근대화가 시작되었다.

 맑스주의의 근대화는 한편으로는 모든 지식이 실증과학으로 되리라는 엥겔스의 입장의 연장선상에서 ‘실증주의’라는 형태로, 다른 한편으로는 실증주의에는 반대하되 근대적 주체철학의 입장에 서는 ‘실천철학’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2-1. 실증주의

 실증주의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물질과 의식, 존재와 사유 간의 일치가능성이었다. 곧, 의식과 사유가 어떻게 과학으로서 정당화되는가? 이렇게 하여 실천 개념은 이론의 검증 수단으로, 유물론은 의식을 통해 물질을 모사하는 반영론으로 된다. 이 입장은 레닌과 스탈린, 나아가 소련 철학 전반에 흐르던 것이다. 레닌은 우리의 감각이란 외적 세계의 모사요, 문제는 자연과 그 반영으로서의 의식의 일치라고 썼다. 참되게 반영된 대상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미 레닌은 객관적 진리를 승인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이 진리는 실천적으로 증명한 것이어야만 객관적인 진리가 된다. 레닌은 이렇게 하여 물질/의식, 혹은 객체/주체의 동일성 문제를 우회한다. 곧, 레닌에게 “현상과 물자체 사이에는 어떠한 원칙적 차이도 없고, 또 있을 수도 없다. 유일한 차이는 알려진 것과 아직 알려지지 않은 것 사이의 차이뿐이다.” 스탈린 시대의 교과서 맑스주의에서 역시 인식의 목적은 진리요, 그 진리에 우리가 도달할 수 있을 것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러한 입장은 대상과 주체를 실천으로 파악했던 맑스의 본래 의도에서 벗어나, 물질/의식이라는 구분을 되살리는 꼴이 되고 만다. 한편, 우리가 현재 도달한 이 인식이 대상과 실제로 일치하는지를 검증할 방법이 없다는 문제가 여전히 남는다. 곧, 실증주의는 객관적인 진리가 있다는 것만을 이야기할 뿐, 그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알려주는 바가 없지 않은가? 그러나 이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는 듯 보인다. 실험과 과학이 그러한 일치를 보장한다는 전제가 이미 있기 때문이다.

 

2-2. 실천철학

 실증주의가 물질/의식이라는 대립쌍을 되살려 냈다면, 실천철학은 실천적 주체/그 대상의 구분을 되살려낸다. 여기에서 인간의 존재론적 본질은 실천이며, 실천은 목적의식적인 주체의 활동으로 이해된다. 체코 자유화 운동 당시 활동한 코지크 등의 인물은 사회적-인간적 현실을 주어진 것에 대립되는, 실천 개념 아래 인간 존재의 영역으로 파악했다. 이 지점에서 인간적인 것과 비인간적인 것의 구별이 발생한다. “실천이란 인간을 대상화하고 자연을 지배함과 동시에 인간의 자유를 실현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연의 통일성을 생산해 내는, 비인간과는 구별되는 실천적 주체라는 것이다.

 루카치 역시 실천 개념을 통해 실증주의를 비판한다. 대상과 주체 간의 근대적 분리는 인식의 주체이자 객체인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통해 극복될 수 있고, 따라서 이 주체가 스스로를 인식하고 의식화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것을 통해 루카치는 엥겔스의 물질/의식 구분이 형이상학으로의 회귀와도 같다고 비판한다. 곧, 고찰의 객체나 대상을 건드리지 않은 채 내버려 두어서는 그 고찰 자체가 단순한 관조에 머물게 된다는 것이다. 

 비슷한 논의가 그람시에게서도 발견되는데, 그 역시 맑스주의를 ‘실천철학’으로 명명한다. 그에게 맑스주의는 철학, 정치, 사유, 행동의 동일성 혹은 균형이다. 그것은 인간의 사고와 행동에 대한 이해, 곧 인간학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은 과연 인간이 자신의 운명을 지배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며 또 스스로를 만들 수 있으며, 나아가 자신의 삶을 창조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다.” 실천이란 곧, 철학과 정치를 통일시키는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인간 활동이다. 그람시 역시 이러한 이유에서 과학주의를 비판한다. 실재는 인간과만 관계될 뿐이고, 진리란 인간과 상관없이 객관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실천 속에서 생산되어야 할 바인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과학주의가 갖는 한계를 넘어섰을지는 모르지만, 여전히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근대적 문제의식에서 출발하고, 주체를 적극적이고 의식적인 활동으로서 파악하고 있다.

 

 이렇게 하여 실증주의와 실천철학은 모두 맑스주의의 본래 문제들을 근대적 틀 속으로 돌려놓아 버린다. 전자는 검증 개념으로, 후자는 주체의 존재론적 특징으로 말미암아서 말이다. 

 

3. 프롤레타리아적 진리

 실증주의와 실천철학 모두에서 프롤레타리아적 사고는 근대적 문제설정으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거기에서 프롤레타리아적 사고는,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출발점으로서 고유의 지위를 재발견한다. 그리하여 19세기 이후 맑스주의의 이 두 흐름은 그 방향은 다를지언정 ‘프롤레타리아적 진리’라는 점으로 수렴한다. 

 

3-1. 실증주의에서 계급적 진리로

 앞서 살폈듯, 실증주의에서 문제는 대상과 일치하는 지식으로서 진리를 얻는 일이었다. 이 관점에서 진리는 과학/이데올로기(진리/허위)의 이분법으로 다루어진다. 과학은 계급적 입장이나 이해관계와는 상관없이 옳은 것이지만, 이데올로기는 계급적 이해관계에 영향 받아 대상을 올바로 왜곡되게 반영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 존재가 사회적 의식을 규정한다”, “의식은 의식된 존재에 다름아니다” 같은 테제를 보자. 여기에서 의식은 사회적 존재와 불가분 얽혀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이렇게 볼 때, 맑스주의에서 모든 관념이나 지식은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닐까?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딜레마가 따라나온다. 1) 실증주의에서 ‘과학’이라고 부르던 그 모든 것은, 결국 그것이 어떤 상부구조인 한에서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닌가? 과학은 계급의식으로부터 자유로운가? 2) 만일 과학이 진리여야 한다면, 프롤레타리아적 이데올로기의 역할은 무엇인가? 프롤레타리아의 입장을 대변하는 맑스주의는 허위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으면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에 대해서만 과학의 지위를 허하는 예외를 둘 것인가? 

 이 이율배반을 해소하기 위해 참조되는 것이 ‘과학적 지식에 대한 계급투쟁의 효과’에 대한 맑스의 견해이다. 맑스는 계급투쟁이 이론적, 실천적으로 공개적이고 위협적으로 되면, 부르주아 경제학은 그 이론이 옳은가 옳지 않은가보다는 그것을 채택하는 것이 유리한가 불리한가, 위험한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 움직인다고 주장했다. 과학조차도 여기에서는 상황과 이해관계에 따라 일관성 없이 채택되거나 기각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만약 과학이 옳은 것이려면, 옳은 것을 일관되게 추구할 수 있는 계급에 의해 추구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오로지 진보적 계급이고, 따라서 과학이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진보적 계급에 의해 추구되어야 할 바이다. 따라서, 진보적 계급의 이데올로기=진리, 반동적 계급의 이데올로기=허위. 프롤레타리아는 진리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 또한 자기의 이해관계에 부합하는 유일한 계급이라는 것이다. 

 이율배반은 이렇게 해소된다. 곧, 계급적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는 진리가 있다면, 그것은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또한 자신의 이해관계와도 직결되는 진보적 계급 (프롤레타리아)에 의해서만 연구될 수 있다. 프롤레타리아의 이데올로기는 진리를 계급적 이해 속에 포함한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 의식은 참된 의식이요 진리다.

 보편적 진리는 이렇게 프롤레타리아의 입장에서만 가능한 것이 되고, 이것은 실천철학의 입장에서 루카치가 내세웠던 프롤레타리아 이해와 일치한다. 실증주의는 근대적 진리 개념에서 출발해, 환원론적 역사유물론을 극복하기 위해 계급 간의 진리이론을 도입하였고, 실천철학의 그것과 같은 프롤레타리아 이해에 도달한 것이다. 

 

3-2. 실천철학에서 계급적 진리로

 실천철학적 입장은 인간 범주 속으로 모든 것을 집어넣으려는 경향을 보이지만, 실천철학의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프롤레타리아 의식에 관한 이론으로 넘어가는 논리를 명확히 보여주는 것은 루카치의 저작이다. 그는 (헤겔적으로) 인간의 의식 없는 지식이란 지식일 수 없다고 보고, 그런 것이 가능하다고 여기는 실증주의적 입장을 물상화된 자본주의의 산물이라 여긴다. 그가 보기에 진리란 주체와 상관없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주체와 객체가 통일될 때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때 주체와 객체가 통일되는 것이 가능해지는 계급이 프롤레타리아라는 것이다. 주체=객체인 계급의 자기의식이 곧 진리이고, 그러한 계급은 프롤레타리아이며, 그러한 계급의식을 현실적으로 담지하는 것은 당이다. 

 

 이상의 흐름을 볼 때, 1) 프롤레타리아는 진리의 존재론적 전제다. 프롤레타리아는 그 계급적 이해에 진리를 품고 있거나, 주객의 통일적 인식이 가능한, 보편적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계급으로 파악되기 때문이다. 2) 진리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통해서만 가능해지는 계급적 진리이다. 진리에 대해 말할 때, 프롤레타리아 계급이야말로 참된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3) 계급적 진리를 담지하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몸체는 당이다. 당은 프롤레타리아의 실천적 진보성과 이론적 관심을 대변한다. 4) 근대적 딜레마는 여기에서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실증주의에서는 인식이 대상의 반영이라는 전제 아래, 진리가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통해 언젠가 도달할 수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한편 실천철학에서는 프롤레타리아야말로 주객간의 일치를 이룰 수 있는 계급으로 이해된다. 그것이 진리에 도달하는 것이 방해받는다면 그것은 어떤 장애물에 의해서이지 내재적인 한계에 의해서가 아니다. (따라서 두 경우 모두, 진리에의 도달은 이미 가능한 것으로 전제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a) 계급의식이 진리라는 것을 받아들이더라도, 의식의 한 상태가 진정한 계급의식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는지가 분명하지 않다. 우리는 근거 없이 단지 그것의 참을 가정할 뿐이다. b) 프롤레타리아적 의식을 진리로 간주하자면, 몇 가지 이론적 환원이 나타난다. 프롤레타리아적 실천은 프롤레타리아적 지식으로 환원되고, 그 지식은 이미 진리로 간주되고 있는 지배적 형태의 맑스주의로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는 참된 의식이요 진리로 이해된다), 이 맑스주의는 프롤레타리아의 의식을 담지하는 당의 결정으로 환원된다. 당의 결정이 중앙위원회의 결정으로, 또 지도자 한 사람의 결정으로 몰리는 상황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3-3. 프롤레타리아적 주체 형성

 맑스의 기획은 생산양식을 역사화하여 파악함으로써, 자본주의 생산양식 또한 상대화하여서 그 변혁의 가능성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위해서는 프롤레타리아를 하나의 계급으로 형성해 내야 했다. 곧,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로 ‘오염’된 대중을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로 교육하고 의식화하기. 당의 기능과 활동은 이러한 맥락에서 조직되고 정당화된다. 당은 대중의 의식화와 조직을 담당하는 전위다. 이러한 가운데 당은 대중의 이해를 보다 정확히 반영하며 실천을 통해 이 과정 전체를 검증한다. 이것이 ‘전위와 대중의 변증법’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당은 프롤레타리아라는 주체적 계급의 자기의식과도 같은 것이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묶인 대중은 이 자기의식에 의해 교육받고 의식화되어야 한다. 이러한 관점은 사회를 계몽된 자와 그렇지 않은 자로 나누었던 계몽적 이분법과 닮아 있지는 않은가? 여하간 이러한 이유로 하여서 당의 판단과 대중의 판단이 빗나갈 때 당은 ‘당의 신뢰를 저버린’ 대중을 비난할 수 있게 된다. 나아가 스탈린주의에 이르면 대중운동이란 당의 결정을 집행하고 그것을 확인하기 위한 동원운동으로 대체되기에 이른다. 

 

4. 맑스의 철학적 공간

 맑스주의는 종전까지의 철학에서 당연시되던 것을 뒤집으면서 대상, 인식, 진리, 윤리에 대한 개념적 전회를 이루어냈다. 그러나 이 탈근대적 사고의 공간은 곧바로 과학주의라는 이중의 한계에 가로막혔고, 이것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실증주의와 실천철학은 각각 방향은 다르되 다시금 근대적 문제의식으로 회귀하고 말았다. 다시금 근대적으로 된 맑스주의는 ‘정통’ 맑스주의라는 이름 아래 고착화되고 체계화되었고, 새로운 차원의 혁명적 실천을 허용하지 않게 되어 버린 것은 아닐까? 맑스가 열었던 탈근대적 사유의 공간으로 다시 되돌아가서, 진정으로 근대성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