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작가별 분류)/Jacques Rancière

자크 랑시에르, ⟪무지한 스승⟫ 제4장_무시의 사회

CucuClock 2023. 8. 28.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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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한 사회’는 없고 지금의 사회만이 있다. 해방의 논리가 지금의 사회에서 힘을 얻기 위해서, 사회질서의 비이성적 힘 관계를 이용할 수 있다는 랑시에르의 논점이 흥미롭다.. 일단 요약부터 끝내고 다시 검토하면서 내 의문들도 어서 정리해 보고 싶다.

그건 그거고 원래 이틀에 한 챕터씩 끝내려고 했는데 글이 너무 어려워서 미루고 미루다 4장 다 보는 데 3일이 걸렸다. 오래 걸려도 (+아직 요약문 문장이 충분히 쉽게 읽히지 않는 것 같기는 하지만) 진득허니 한 흐름으로 엮어내는 경험이 역시 중요한 것 같다. 이렇게 안 하고 대충 넘어간 글들이 그동안 얼마나 많았던가…

암튼진짜어려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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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랑시에르, 《무지한 스승》 읽기

2023.08.27. (일)

 

제4장 무시의 사회 La société du mépris (pp.145-186)

 보편적 가르침의 이상은 곧바로 현실적인 문제들에 부딪힌다. 기존의 설명 질서 안에서 움직이던 이들은 자코토의 시도를 비난하고 나섰다. 

 

무게의 법칙 Les lois de la pesanteur (pp.147-153)

1. 개인의 이성, 이성 밖의 물질[각주:1] (pp.147-149) 개인의 지능은 오직 개인에게만 속한다. 그리고 그러한 개인의 지능은 “물질의 법칙을 따르지 않는다.” (p.148) 그러나 개인의 지능이 개인에게만 속하므로, 개인들의 모임 자체에는 지능이 없다. 그러면 개인들의 모임을 주재하는 힘은 무엇일까? 그것은 개인 밖에 있는 어떤 물질적인 것들이다.[각주:2] 요컨대, “두 지적인 원리가 하나의 지적인 창조를 하지 않는다.” 그들은 공통된 물질적 중심에 의해 묶이게 될 뿐이다. 

 

 그러나 때로 이 물질적 중심은 바보 만들기의 중심이 되기도 한다. “진리라는 부재하는 별 주위를 도는 각 지능의 자유로운 공전, 단어의 날개를 단 자유로운 소통의 장거리 비행은 물질계의 중심으로 향하는 만유인력 때문에 저지되고 빗나간다.” (p.149) 

 

2. 사회집단에 대한 설명 (pp.149-151)

 이성과 지능은 개인에게 속하지, 개인 밖의 물질이나 사회 집단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사회집단은 원리상 한낱 자의적인 것이 되고 마는 것일까? 사회집단이 자연스러운 것일 수는 있는 것일까?

 한 가지 가능성은 지능이 불평등한 경우다. 우월한 지능과 열등한 지능이 있고, 우월한 지능은 열등한 지능에게 명령하고 앎이나 도덕을 강요할 것이다. 법과 협약은 필요하지 않고, 이미 정해진 질서만이 있다. 

 그러나 사정은 그렇지가 않다. 법과 협약이 있고, 사회 질서가 만들어진다. 때로는 대중의 의지와는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오기도 한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자코토는 “개별 인간은 자유롭지만, 인간들의 모임은 그렇지 않다”는 가정으로 나아간다. 우리는 (3장에서) 언어의 사용이 자의적이더라도 그것이 소통에는 별다른 지장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았다. 이것을 받아들인다면, 지능의 불평등을 가정하지 않고도 인류 각각의 이성적인 의지가 서로 조화를 이루고 결집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개인의 의지들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발현되므로, 이 조화에서 벗어나는 움직임이 항상 있다. “그러므로 어떤 주어진 순간에, 조합, 국가, 종種, 유類는 동시에 이성적이기도 하고 무분별하기도 하다.” (p.151)

 

3. 주의와 부주의, 정신과 물질 (pp.151-153)

 그런데 왜 개별 인간의 자유로운 작용이 하나의 질서로 빨려 들어가곤 하는 것일까? 그것은 다름 아니라 부주의와 게으름이라는 악덕 때문이다. 이야기하고 짐작하며 소통하기를 바라지 않는 이는 ‘나는 할 수 없어요’라고 말한다. “태어날 때부터 지적 결함이 있다고 주장하는 이 존재들은 그들이 싫어하는 공부, 그들이 흥미 없어하는 훈련에서 면제받기 위한 구실을 바랄 뿐이다.”[각주:3] (pp.152-153)

 

불평등에 대한 정념 La passion de l’inégalité (pp.153-157)

  1. 비이성과 불평등 (pp.153-154)

 지능이 자유롭게 발현되지 못하고 고정된 질서에 갇히는 이유는 무시, 즉 ‘불평등에 대한 정념’이다. 평등은 끊임없이 자유를 발휘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서로 비교하고 어떤 불평등을 가정하는 편한 길을 택하는 것이다. “불평등주의적 무분별 때문에 개인은 스스로를 포기하고, 자신의 본질이 지닌 공통의 척도로 잴 수 없는 비물질성을 포기한다.” (p.154) 이 불평등주의 탓에 인간들의 협약은 더 이상 이성적이지 않게 되는 것이다.

 

2. 불평등과 사회적 종속 (pp.154-155)

 불평등에 대한 이 정념이 불러오는 사회적 종속은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두 가지 방식으로 표현된다. (1) 사회 질서는 물질의 필연에 종속되어 있다. 사회 질서는 이미 정해진 불평등의 질서에 의해 바꿀 수 없는 영원한 것처럼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2) 사회 질서는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지능과 의지는 개인에게만 있으므로, 인간을 종속시키는 질서는 상상의 산물일 뿐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불평등에 대한 정념은 허구적이고 텅 빈 질서에 인간들을 철저히 고정시킨다.[각주:4]

 

3. 언어의 외재성, 전쟁을 위한 수사학 (pp.155-157)

 “따라서 사회 세계는 그저 비이성의 세계가 아니라, 무분별의 세계, 다시 말해 불평등에 대한 정념에 사로잡힌 왜곡된 의지 활동의 세계다.” (p.156) 이 게으름과 무시가 제도로서 체계화되고,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질서 속에서 “의지는 이제 스스로 짐작하거나, 상대로 하여금 자신의 말을 짐작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 (p.157) 불평등에 의해 왜곡된 의지는 이런 식으로 작용한다.

 왜곡된 의지는 패권에 협력하도록, 다른 지능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지 않도록 길들여진다. 그것은 언어의 자의성보다는 근본적인 외재성을 받아들인다. 이 왜곡된 의지는 따라서 타자의 이야기를 번역하고 짐작하기보다는 서둘러 그것을 파악하고 무시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돌려 버릴 것이다. 그것은 상대를 침묵시키거나, 상대의 이성을 거부하는 ‘전쟁’과도 같은 것이다. 여기에서는 소통의 의지와 평등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상대를 굴복시키고 그 의지를 무화시키기 위한 기술, 즉 ‘수사적인 방식’이 중요한 것이 된다.

 

수사적 광기 La folie rhétorique (pp.158-163)

  1. 벤담의 궤변 비판 (pp.158-160)

 영국의 철학자 제레미 벤담은 권위에 호소하는 영국 보수 의회에 맞서 실상을 가리는 궤변을 고발한다. 즉, 벤담은 원래 질서의 수혜자들이 권위에 기대거나 포장된 말로 핵심을 피해가면서 개혁을 저지하고자 하는 것을 비판했다. 그는 그리고는 이러한 권위와는 상관없이 “합리적 사고의 자유를 배운 인간들이 궤변에 효과적으로 맞서 싸울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성을 연마하여 사태를 포장 없이 바라볼 수 있는 이름을 붙이고, 관념을 정확히 포착하는 “참된 언어활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2. 문제는 궤변이 아니라 의지의 무화다 (pp.160-163)

 “자코토는 위와 같은 낙관주의를 거부한다. 이성의 언어활동은 없다. 오로지 말하는 의도에 대한 이성의 통제만 있다.” (p.160) 문제는 참된 언어활동에 이르지 못한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의적인 언어가 스스로를 진리라고 강요하고, 행위를 강제하고자 할 때 생긴다. 즉, 수사학의 진짜 문제는 벤담이 파악했던 것처럼 거짓 추론들을 지어내고 편견을 덧붙이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함으로써 “이해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의지를 무화”시키는 것이다. 웅변가는 말로써 다른 사람들의 이성을 침묵시키는 자다. 서로 이해하기 위한 자의적 언어의 끝없는 대화는 웅변가의 계산적인 말하기로써 중단된다. 

 

우월한 열등자들 Les inférieurs supérieurs (pp.164-168)

1. 우월한 열등자의 역설 (pp.164-165)

 우월한 자들은 대중의 무분별을 비난한다. 그러나 앞에서 살폈듯 이 무분별이 발생하는 것은 우월한 자들이 움직이는 바로 그 원리, 곧 지능의 불평등에 대한 느낌이다.[각주:5] 이들은 상대의 말을 듣고 이성적으로 소통하기를 시도하기보다, 이미 정해진 위계를 수사학적으로 정당화하며 상대를 침묵시키고자 할 따름이다. 그러나 여기에 어떤 역설이 있다. 여기에서 “각자는 자기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자에게 복종한다.” (p.165) 곧, 우월한 자들은 그 순간에 자기를 정당화하기 위해 수사학을 동원해 대중의 법칙에 종속되기를 자처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월한 열등자들의 역설이다.

 

2. 지배는 자연스럽지 않다 (pp.165-168)

 우월한 자들은 자신들의 우월성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정당화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이 모두에 의해서 그 자체로 이해되지 않고, 수사학을 통해 강요된 침묵에 따라서만 이해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을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을까? 자연스러운 질서는 없고, 상황과 협약만이 있을 뿐이다. 그 자체로 불평등을 이해하려면, 모두가 주의 깊게 참인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불평등을 그 자체로 자연스러운 것으로 이해하려면, 차라리 우리는 지적 평등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지적 위계 속에서 과연 누가 우월한 자들의 우월함을 검증할 수 있으리라는 말인가?

 그러나 지적 평등을 받아들이는 순간 또 다시 사회 질서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게 된다. 어떻게 평등한 자들이 서로를 지배하고 복종시킬 수 있다는 말인가? 따라서 불평등은 항상 상황에 의해, 혹은 어떤 자의적인 협약에 의해서 만들어질 뿐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이로부터 우리는 지금의 질서와 위계는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변화할 수 있으리라는 것 또한 알 수 있다.

 

철인왕과 인민 주권자 Le roi philosophe et le peuple souverain (pp.169-172)

 이성은 스스로 이성을 발휘할 수 있는 개인들에게 있지, 사회 혹은 사회를 이루는 ‘시민’들에게 있지 않다. 따라서 그 자체로 합리적인 사회 질서를 구상하려는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시도의 한편에는 ‘철학자 왕’을 꿈꾸는 플라톤의 기획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근대의 인민주권에 대한 꿈이 있다. 

 그러나 앞서 살폈듯 우월한 철학자 왕의 권위가 유지되는 것은 그가 열등한 자에게 복종하기 때문이다. 한편, 바로 이렇기 때문에 인민주권은 실현해야 할 이상이 아니라 언제나 이미 있어 왔던 어떤 것이다. 왕이 인민의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면 권좌를 잃는다. 반대로 “인민은 자신을 양도하여 그의 우두머리에게 종속된다.” (p.170) 이성적인 ‘시민들’은 없다. 그들은 지금껏 주권을 가지지 못했던 것이 아니라, 주권을 양도해 우두머리를 세워 왔을 뿐이다.

 이성적인 작용은 고독하게 자기를 의식하는 인간들에게 있지, 정치적 실력을 행사하는 이들에게 있지 않다. “우리는 인간들 사이에서만 평등이 있다고, 다시 말해 서로를 이성적 존재로 바라보는 인간들 사이에만 평등이 있다고 말한다. 반대로 시민 (정치적 허구의 주민)은 불평등의 나라에 사는 타락한 인간이다.” (p.171)

 

어떻게 이성적으로 헛소리할까? 

Comment déraisonner raisonnablement (pp.172-182)

1. 이성적인 자들이 수사학을 배우다 (pp.172-178)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성적 인간은 사회 질서에 속해 있지 않은가? 이성적 인간은 무분별한 사회 질서에 대해, 스스로를 법 위에 있는 존재로 생각하거나 그것에 일정 부분 자신을 내어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전자의 경우, 그것은 스스로에게 우월성을 부여하는 일이고, 또 다른 우월한 열등자의 역설에 자신을 빠져들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사회 질서를 이성의 힘보다 위에 위치한 신비로 볼 것이다.” (p.173) 그러나 동시에 그는 자신의 이성을 단념하지 않는다. 곧, 그는 자신을 무분별한 사회의 명령에 일정 부분 양도하되 이성적인 존재로 남을 수 있는 여지를 둘 것이다.

 사회적 무분별은 우월한 자와 열등한 자를 구분하는 데에서 오는 전쟁이다. 거기에 상대를 이성적 존재로 여기고 소통하려는 의지는 없다. 그에 따라 사회는 정의로운 전쟁과 그렇지 않은 전쟁을 구분한다. 

 자코토 역시 포병 출신으로 몇 차례의 전쟁을 경험했으나, 그는 여기에서 무분별한 사회와 이성적 존재의 구분을 본다. 이성적 존재는 시민으로서 사회의 명령에 따르지만, 이성적 존재로 남고자 한다. 그는 한편으로는 사회의 명령에 복종하면서, 자기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고 자신의 이성을 멈추지 않게 함으로써 이성적 존재로서의 스스로를 지킬 것이다. 

 불평등에 대한 정념과 사회적 힘에 의해 좌우되는 법과 의회 안에서도 이성이 설 자리는 없다. 여기에서도 우세한 것은 전쟁의 법칙, 그리고 수사학의 기술이다. 그때 이성적 존재는 어떻게 움직여야 할까? “알다시피 수사학은 이성과 아무 상관없다. 그러나 그 역도 참인가?” (p.176) 이성적 존재는 더듬더듬 어떤 언어든지 배울 수 있다. 이성적 존재가 의회의 언어와 재판정의 언어, 그러니까 “헛소리하는 법”을 배울 수는 없을까? 이것이 게으름으로 자신의 이성을 사회 질서에 내맡겨 버리는 것과는 어떻게 다를까? 

 

2. 웅변가보다 더 잘 헛소리하는 이성적인 자들 (pp.178-182)

 이성적 존재는 이제 웅변가와도 같이 수사법을 구사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보편적 가르침을 벤담이 말한 것과 같은 궤변에 동참시키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극단적 무분별 속에서도 이성을 능동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이성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보이는 것이다. (p.178) 수사학을 동원하는 중에도 이성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불평등의 정념이 할 수 있는 것을 주의 깊은 의지가 역시 해낼 수 있음을 보여주기. 여기에는 무분별 속에서도 이성적으로 남아 있을 수 있는 의연함의 교훈이 있다.

 의연한 자들은 의회와 법정의 언어를 배워야 한다. 그리고 동시에 지적인 평등을 믿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우월한 존재라는 믿음 때문에 수사학을 배우려 하지 않고, 끝내 사회를 바꾸지 못한 소크라테스처럼 되고 말 것이다.[각주:6] 말하자면 해방된 자들은 더 좋은 헛소리꾼들이 되어 사회를 바꿔야 하는 것이다. 

 

 

아벤티누스 위에서 한 말 La parole sur l’Aventin (pp.182-186)

 모든 사회 질서에서 개인은 이성적일 수 있다. 그리고 “사회는 결코 이성적이지 않겠지만 이성적 순간들의 기적이 사회에 일어날 수 있다.” 그것은 “이성적 의지들이 서로를 인정하는 순간이다.” (p.182) 로마 제국의 정치가 아그리파는 평민들의 이야기를 듣고, 평민들에게 말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평민들은 보편적 가르침의 원리에 따라 “그보다 더 헛소리를 잘하는 기술”을 배웠다. 이처럼 “사회의 무분별 속에서도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게 남으면서 사회의 무분별에 효과를 낼 수 있는 이성의 삶이 있다.” (p.183)

 이렇게 하여 우리는 불평등이 지배하는 사회 질서 속에서, 그 질서에 복무하는 이들보다 더 훌륭하게 헛소리하는 법을 배움으로써 “지능의 평등을 입증할 수 있고, 이 입증의 효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 (p.185) 해방의 원리는 이렇게 기성의 질서 안에서 현실적으로 퍼져 나갈 수 있게 될 것이다.

 

 

 

 

  1. 여기에서 ‘물질’이라는 말은 여러 가지 의미로 쓰이고 있는 듯 보인다. 인간 지능이 표현되어 소통의 매개가 되는 언어나 작품으로서의 ‘물질’, 혹은 어떤 정해진 질서나 법칙을 따를 수밖에 없는 물리적인 어떤 것으로서의 ‘물질’. [본문으로]
  2. 개인의 지능은 언어, 기계, 몸짓 등으로 표현된다. [본문으로]
  3. ‘나는 할 수 없어요’라고 말하는 자는 대화 상대와의 평등한 소통을 피한다. 어떤 분야에서는 타인의 우월성을 인정함으로써, 어떤 분야에서는 타인을 무시하면서 그는 타인을 이해하거나 타인으로부터 이해받으려는 시도를 피하는 것이다. 여기에 ‘나는 할 수 없어요’라고 말하는 이의 부주의와 게으름이 있다. [본문으로]
  4. 곧, 불평등에 대한 정념은 허구의 사회적 질서를 영원한 것처럼 보이게 만들고, 거기에 인간들을 고정시킨다. [본문으로]
  5. 우월한 자들은 자신들이 열등한 자들에게 알려야 할 어떤 고정된 진리가 있다고 가정하고 그 방향으로 움직인다. 인민들 역시 똑같은 무시의 원리에 의해 결정들을 내린다. ‘테베인들은 저능하고, 우리는 그들보다 우월하므로 전쟁을 통해 테베를 정복해야 한다’, ‘농민들은 세상 물정을 모른다. 노동자 중심의 정책을 펼쳐야 한다...’ [본문으로]
  6. 소크라테스는 ‘소크라테스보다 더 지혜로운 자는 없다’는 델포이 신전의 신탁을 믿었다.

    “아마 여러분은 카이레폰을 알고 있을 것이오. ... 그리고 카이레폰이 어떤 성격의 인물이었으며, 그가 무엇을 시작하면 얼마나 열중하는지도 알고 있을 것이오. 그래서 그 사람은 델포이에 찾아가서 이 일에 관해 용감하게 신탁을 받아 온 것이고—즉, 소크라테스보다 더 지혜 있는 자가 있는지의 여부를 물은 것이오. 그러자 그곳 무녀는 소크라테스보다 지혜 있는 자가 아무도 없다는 신탁을 주었소.” (플라톤, 《소크라테스의 변명》 중에서)
    이렇게 자신을 특별하게 생각한 그는 자신을 고소한 아니토스와 멜레토스의 연설 기술을 가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 배우지 않았다. 그 결과 그는 아니토스와 멜레토스를 사회 질서의 주인들로 남겨 놓은 채 사형 선고를 받아 독배를 마시고 죽는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