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작가별 분류)/Jacques Rancière

자크 랑시에르, ⟪무지한 스승⟫ 제2장_무지한 자의 수업/교훈

CucuClock 2023. 8. 25.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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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랑시에르, 《무지한 스승》 읽기

2023.08.22 (화)

 

제2장 무지한 자의 수업/교훈 La leçon de l’ignorant (pp.45-90)

 

  1. 칼립소, 칼립소는 못 했다! (pp.45-47)

 루뱅의 프레데릭 왕자는 자코토에게 군사 교관 후보자들을 교육하도록 했다. 신병들은 《텔레마코스의 모험》을 각자 손에 쥐고 벤치에 나가 앉아 1장 절반의 문장들을 반복했고, 두 달 뒤 누군가는 영어를, 누군가는 독일어를, 축성술을, 화학을 배웠다. 물론 자코토는 이것 모두를 알고 있지는 못했다. “이것이 보편적 가르침이오. 제자가 스승 노릇을 하는 것이라오.” (p.46) 학생들은 이 책을 충분히 숙지할 만큼 되풀이해 읽고, 그들이 알게 된 것을 말해 볼 것을 요구받는다. 이때 학생들은 자신이 말하는 모든 것을 자기가 읽은 책으로부터 끌어와야 한다. “간단히 말해 스승은 학생이 말할 모든 것의 물질성을 책 속에서 검증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p.47)

 

책의 섬 L’île du livre (pp.47-57)

 《텔레마코스의 모험》은 유명한 소설은 아니지만, 베르길리우스의 라틴어와 호메로스의 그리스어, 백여 개의 다른 이야기들이 촘촘히 얽혀 들어가 있는 고전이다. 그것은 프랑스어로 쓰여 있지만, 라틴어와 그리스어의 힘과 흔적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무언가 새로운 것을 배울 때, 그 새로운 것을 덧붙여 나갈 수 있는 ‘중심’이 되어 준다. “하나의 전체가 되는 책.” (p.48) 무언가를 배우기 위해서는 그 무언가를 덧붙일 중심이 필요하다. 그러니 먼저 그 중심이 되는 무언가quelque chose를 배워야 한다.[각주:1]

 

  1. 훼손으로서의 앎 (pp.49-51)

 그러나 오래된 설명의 논리는 우리가 먼저 어떤 것telle chose을 배우고, 그 다음에 다른 어떤 것을 배우고, 그 다음에 다른 어떤 것...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수업이 끊임없이 계속되고, 학생은 먼저 저 멀리에 나아가 있는 스승을 따라잡을 수 없다. 항상 자신보다 앞서 있는 스승이 있으므로, 학생은 어떤 결함이나 결여를 품고 있다. 따라서 “앎의 체계적인 개선은 무한정 되풀이되는 훼손이다.” (p.50)[각주:2] 학생의 훼손은 두 가지 방향으로 이루어진다. 첫째, 앞으로 배울 것을 아직 알지 못한다는 의미에서의 훼손, 둘째, 이미 배워서 익숙해진 것을 까먹고 다음 것으로 넘어가는 의미에서의 훼손. 둘째 경우가 주목할 만한데, 이미 익숙해진 것을 까먹은 자의 무지는 자신의 것이 아니라 아직 그 단계를 거치지 못한 사람들의 무지이다.[각주:3] 그들은 이해했고, 따라서 까먹는다. 그리고 그들은 아직 자신들의 처지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을, 자신을 바보로 만든 설명자들과 함께 위에서 내려다본다. “이것이 설명자들이 지닌 천재성이다. 설명자들은 그들이 열등하게 만든 존재로 하여금 자신들을 따르게 한다.” (p.51) 열등한 자들의 우월의식을 이용해서 말이다. 이 우월한 학생은 인민의 무지를 측은하게 여겨, 장래에 또 다시 어떤 설명의 과정에 복무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2. 붙들고 읽으시오 (pp.51-55)

 반면 자코토는 《텔레마코스의 모험》이라는 무언가를 툭 던져 주고, 그저 “붙들고 읽으시오.”라고 말할 뿐이다. 학생은 그 책을 가지고 무엇이든 말할 수 있다. 단지 “그는 그의 자유의 행사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각주:4] 스승은 그저 문가에 서서 학생에게 질문을 던지며 말할 자유를 행사하도록 할 권리만을 가지고 있다. 그 결과 학생은 누군가의 인도 없이 “무엇을 보고 있니? 너는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니? 너는 그것을 가지고 무엇을 하니?” (p.54) 하는 무한한 질문에 답해야 한다. 그러나 그 대답들이 나아가는 것은 학생 자신이 자신에게 부과한 방법에 의해서이지, 스승의 방법에 의해서가 아니다. “나는 할 수 없어요”라고 말하지 말라, 그렇지 않게 되는 순간, 너는 책 속에서 “나는 할 수 없어요”라고 말하는 수없이 많은 방법을 발견하게 되리라! [각주:5] (p.55)

 

3. 부정과 차이에 기대는 이중의 논증 (pp.55-57)

 구식의 설명 논리는 자코토의 이 실험에 대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당신들은 단지 되풀이하며 기억이라는 하나의 능력만을 키울 뿐이다. 그런데 인간의 두뇌는 그러한 기억을 해낼 수 없다. 말하자면 그들은 ‘기억’이 지능과는 다른 것이라고 전제하고, 기억의 무능함과 취약성을 믿는다. 따라서 구식의 주장을 새로 써 보면 이렇게 될 것이다: “열등한 자들과 우등한 자들이 있다. 열등한 자들은 우등한 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을 할 수 없다.” 그런데 이 논증은 아무것도 주장하고 있는 바가 없다. ‘열등한 자’는 애초에 ‘우등한 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을 할 수 없는 자들’로 전제되기 때문이다. 즉, 구식의 논증은 처음부터 우등한 자와 열등한 자의 구분을 그저 필요로 할 따름이다.

 결론적으로 구식의 논리는, 인간의 지능이 실제로 어떻게 무언가를 배우는가와는 상관없이 어떤 불평등을 요청한다. 기억과 지성의 위계, 아이의 지능과 어른의 지능, 우등한 지능과 열등한 지능. 이 차이는 언제나 ‘지성이 할 수 있는 것을 기억은 할 수 없다’, ‘아이의 지능은 어른의 지능이 아니다’, ‘열등한 지능은 우등한 지능이 할 수 있는 것을 할 수 없다’는 식의 차이와 부정으로만 표현된다.

 

칼립소와 열쇠공 Calypso et le serrurier (pp.57-64)

 보편적 가르침에 의한 배움은 명령하는 의지와 복종하는 지능으로 구성된다. 이 지능은 명령하는 의지의 “주의” 아래 주어진 것을 기억하고 회상하며 더듬더듬 익힌다.[각주:6] 구식의 논리는 기억과 이해를 다른 것으로 파악했지만 여기에서 그 구분은 중요하지 않다. 모든 능력이 같은 질서에 속한다. “역량은 분할되지 않는다.” (p.58) 모든 능력이 같은 질서에 속하므로, 한 사람이 한 것을 다른 사람도 할 수 있다.[각주:7] 이것이 “전체가 전체 안에 있다”는 말이 뜻하는 바다. 《텔레마코스의 모험》 1장을 익히면서 우리가 발휘하는 능력은 우리의 다른 모든 능력과 같다. 이 책 한 권 안에 언어의 모든 역량이 들어 있다.[각주:8] 곧, 그 책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발현할 수 있는, 모든 인간의 지적 역량이다. 지적 능력의 본성상 평등이 있다. 우리가 지능의 불평등으로 치부하는 것은 실상 지능의 발현상의 불평등이다. 

 

 

 구식의 논리는 ‘CA’를 발음하기 위해서는 ‘C’와 ‘A’를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철자를 모르는 학생은 혼자서는 발음할 수 없다. 반면 해방의 논리는 칼립소에서 시작한다. 해방의 논리는 학생들이 자신의 지능을 오로지 자신을 위해, 자기 스스로 쓰도록 하는 것이다. 스승은 단지 학생에게 무엇이 보이는지, 무엇을 찾았는지 질문하며 학생 스스로가 자신의 자유를 행사하고 있는지 검증할 뿐이다.

 

스승과 소크라테스 Le maître et Socrate (pp.64-67)

 무지한 스승은 자신의 학식에 학생의 대답을 비추어 볼 필요가 없고, 단지 학생의 학습이 주의 깊게 이루어졌는지 검사한다.[각주:9] 이 방법은 학생 안의 앎을 이끌어내는 소크라테스의 방법과는 다른데, 그는 질문을 던짐으로써 그저 학생의 무능을 증명할 뿐이기 때문이다.[각주:10] “소크라테스는 자기 안에서 노예로 남아 있도록 운명 지어진 노예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언제나 더 많이 아는 사람의 위치에서 질문하고, 지도하기 위해서 질문한다. 반면, 무지한 스승은 학생보다 실제로 더 많이 알지 못하는 자, 학생보다 앞서 여행을 하지 않은 자다. 그는 식자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인간의 관점에서 학생에게 질문을 던진다. 무지한 스승은 학생보다 아는 것이 많지 않지만 학생에게 질문할 수 있다. 학생이 무엇을 보고 있는가? 그것을 가지고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하는가?

 

 

무지한 자의 힘 Le pouvoir de l’ignorant (pp.67-72)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학생이 정말 자신의 힘으로 어떤 답을 내놓았는지, 아니면 답을 내놓으라는 스승의 질문을 피해 아무 말이나 뱉은 것인지 무지한 스승이 어떻게 검증할 수 있다는 말인가? 하지만, 무지한 스승은 학생이 찾아낸 것이 아니라 구해낸 것을 검증한다.[각주:11] 그리고 그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 무지하지만 해방된 어머니가 아이에게 아버지란 단어가 어디에 있냐고 물을 때마다 아이가 항상 같은 단어를 대는지 아닌지를 그녀가 주목하지 못하게 막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어머니가 이 단어를 가리고 내 손가락 아래 있는 단어가 무엇이냐고 묻지 못하게 막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등등. (p.68)

 

  인간의 지적 능력에는 위계가 없다. 무지한 스승의 질문은 학생의 무지를 전제하지 않는다. 따라서 무지한 스승의 이 실험은 “학식이 더 이상 도움을 주지 않는 곳에서 이성의 순수한 힘들을 해방하는 결정적 실험이다.” (p.69)

 무지한 스승과 학생 사이에 배움의 재료가 되는 어떤 사물만 있다면, 두 정신은 평등하게 이어질 수 있다. 이 사물은 스승과 학생의 정신을 이어 주는 통로 역할을 하는 동시에, 무지한 자가 배움의 내용을 알지 못하더라도 학생의 주의를 검증할 수 있게 해 준다 (p.71의 대화를 읽어 보라). 스승은 학생이 배우는 내용을 그 무엇도 알지 못하지만, 단지 학생이 어떤 것을 구하기를 계속하도록 할 뿐이다. 

 

각자의 일 L’affaire de chacun (pp.72-81)

 그런데, 학생을 해방하기 위해서는 스승이 먼저 해방되어 있어야 한다 (지적 역량의 동등함을 이해하고, 자기 스스로를 먼저 평등한 존재로 인식해야 한다).[각주:12] 우리는 어떻게 이러한 자기 인식에 도달할 수 있을까?

 

  1. 플라톤과 진보의 시대 (pp.72-76)

 플라톤은 사람들이 타고나는 기질에 따라 그들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나누고 “네 고유한 일 말고 다른 것은 하지 말라”고 명령한다. (p.73) 진보의 시대 (프랑스혁명 이후, ‘혁명을 완성하자’는 슬로건이 울려퍼졌던 계몽의 시대)는 이 격률을 거부한다. 이 시기에 사람들은 모두 ‘말할 줄 아는 자라면 사유할 줄도 안다’는 믿음 아래, 보편지식과 공화국의 가치를 전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여기에 잘 만들어진 방법 없이 자기 마음대로 통념과 가치관을 형성하는 사람은 방해가 될 뿐이다. 잘못된 관념을 형성하는 농부나 장인의 지식은 거부된다 (학생들은 여전히 농부나 장인이 될 수도 있을 텐데 말이다).[각주:13] 여기에 지식과 “활동과 조건”의 분리라는 첫 번째 모순이 있다. 두 번째 모순은 누구나 쓸 수 있는 평등한 학식을 전달하는 데 지능의 불평등이 전제된다는 것이다. 경직되고 수직적인 질서를 극복하기 위한 움직임이 역설적이게도 지능의 계급을 끌어들이고 있다. 진보의 시대는 스승의 역할 (지도instruction)과 가장의 역할 (교육éducation)을 철저히 분리한다. 이러한 가운데 가장의 역할은 ‘이중의 바보 만들기’가 된다. 아이에게 학식을 전달하는 것은 유식한 자로서의 스승의 역할이다. 따라서 가장은 ‘지적 무능력의 온상’이 된다. 한편, 가장은 그의 활동과 조건에 머물면서, “그의 조건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 덕을 가르친다. “그가 무엇을 하는지에 대한 의식은 그의 것이 아닌 학식에 속한다. 그가 누구인지에 대한 의식은 그를 그 자신의 일 말고는 다른 어떤 것도 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그를 이끈다.[각주:14] 설명의 질서 아래에서는 학생 못지않게, 가장도 바보가 된다.

 

 

2. 나는 인간이다, 고로 나는 생각한다 (pp.76-81)

 해방은 여기에 반대된다. 해방의 방법은 보편적 가르침이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대신, “나는 (모두는) 인간이다, 고로 생각한다.” 설명의 질서가 제거되면 가장은 자기가 주체가 되는 지적 활동들을 의식하면서 자식을 해방할 수 있게 된다. 해방하는 스승은 “너는 이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니?”라고 끊임없이 질문하면서 학생이 스스로의 지능을 활용해 할 수 있는 것의 목록을 작성하도록 (넓혀 가도록) 한다. 더 이상 지적 능력의 질적 차이는 전제되지 않는다. “단지 언어를 이해하고 말하는 것만이 문제다.”[각주:15] (p.79) “언어로 빚은 모든 작품은 같은 방식으로 이해되고 실행”되므로, 이것을 깨달은 해방된 스승은, 둘을 평등하게 이어 주는 어떤 사물만 있다면 학생이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더라도 검증할 수 있다. 

 

장님과 그의 개 L’aveugle et son chien (pp.81-86)

 해방의 원리는 학생이 자신이 가지고 공부하는 책의 작가와 자신의 지능이 동일하다는 것을 깨닫는 판에카스티크panécastique (pan모든 + hekastos각각의)의 원리에 있다. 각각의 지능이 발현된 방식 속에 다른 모든 지능의 발현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 지적 평등의 의식이 해방의 원리에 다름아닌 것이다.

 반면 유식한 자들의 바보 만들기는 실상 자기 자신마저도 바보로 만들어 버린다. 열등한 자들은 우월한 자가 정말 우월한지를 판단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미 바보가 되어 버린 열등한 자들은 우월한 자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각주:16] 유식한 자들에 의해 바보로 규정된 이들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다. “나는 못 하오. 나는 노동자일 뿐이니까.” (p.84) 불평등에 대한 믿음은 우월한 자들을 앞세워 자기 자신을 깎아내린다. 우월한 자들은 열등한 자들을 멸시하고, 열등한 자들, 심지어 우월한 자들조차 다른 우월한 자들을 앞세워 “나는 못 하오”라고 말한다.  우월한 자들은 열등한 자들을 멸시하고, 열등한 자들은 우월한 자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만일 이들 사이에서 대화가 벌어지기라도 한다면 그것은 평등한 대화,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이성적인 대화가 아니다. “지능의 평등이 필요로 하는 이 검증을 허하지 않는다면, 나는 대화 속에서 장님과 그의 개가 나누는 이야기만을 볼 뿐이다.” (p.85)

 

 

전체는 전체 안에 있다 Tout est dans tout (pp.86-90)

 루뱅에서 자코토 씨의 학생들이 보여주는 보편적 가르침의 효과를 목격한 밥티스트 프루사르 씨는, ‘전체가 전체 안에 있다’는 말뜻을 이해하고, 나아가 학생들의 지능이 다른 모든 이들의 지능과 같다는 것을 이해했다. 

 

 

 

 

 

  1. 이 ‘무언가’는 이어지는 ‘어떤 것’과 대립한다.  [본문으로]
  2. 알아야 할 다음 단계가 생기고, 어떤 단계에 도달하기 위해 거쳐야 할 단계가 많아진다. 학생은 또 다시 누군가의 지도를 필요로 한다.  [본문으로]
  3. 단적인 예로, 우리는 어느 순간 이차방정식의 해를 구하는 공식을 매번 유도해서 쓰지 않는다. 공식에 익숙해진 자들의 눈에, 공식을 더듬거리며 적용하는 이들은 아직 공식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자, 아직 그 공식에 익숙해지지 못해 공식의 유도 과정을 더듬거리며 따라갈 수밖에 없는 자들이다. [본문으로]
  4. 즉, 스스로 생각해서 (즉, ‘자유’롭게) 무엇이든 말하기를 멈추어서는 안 된다. 이 문장의 ‘자유’는 (예컨대 말하기 싫다고 말하지 않을 자유와 같은) 통상적이고 소극적인 의미의 자유로 읽어서는 곤란하다. [본문으로]
  5. “나는 할 수 없어요”라고 말하는 대신, 스스로 책 속의 단어를 조합해 다른 무언가를 말하기. 그렇게 스스로 말하고 익히다 보면, 학생은 “나는 할 수 없어요”라는 말조차도 한없이 섬세하게, 혹은 책의 등장인물들의 말씨를 따라 다채로운 방법으로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스승이 어떤 지적 개입도 없이 학생을 믿고, 학생은 스스로 자기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하는 ‘역량의 고리’가 이렇게 시작된다. [본문으로]
  6. “(복종하는) 이 지능을 어떤 의지의 절대 강제 아래에서 걸어가게 만드는 행위를 주의라고 부르기로 하자.” (p.57) [본문으로]
  7. 곧, 더듬더듬 기억해 내는 사람이 이해한 사람이 하는 것을 할 수 있고,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본문으로]
  8. 인간의 모든 지적 능력에 위계는 없다. 《텔레마코스의 모험》 1장을 익히면서 우리가 스스로 발휘하는 능력은 문학, 수학, 과학, 철학을 배울 때 쓰는 바로 그 능력이다. 이 논의를 더 밀고 나가면 다음의 결론이 따라나온다: “모든 인간은 똑같은 지적 존재이다.” 하나의 능력 안에 다른 모든 능력이 할 수 있는 것이 들어 있다. 한 권의 책 안에 그 책으로부터 뻗어나갈 수 있는 모든 방향이 들어 있다. “전체가 전체 안에 있다.” [본문으로]
  9. ‘주의 깊게’, 즉 ‘스스로의 의지를 발휘하여’ 학습이 이루어졌는지. 이것은 선생의 지능과 바보가 된 학생의 지능을 비교하는 것과는 다르다. [본문으로]
  10.  소크라테스는 이른바 ‘산파술’을 통해 무한한 질문의 과정을 거치기는 하지만, 학생들에게 언제나 ‘무지의 지’를 깨치도록 한다. 곧, 자기 능력을 어떻게 스스로 발휘할 수 있는가를 알려주기보다,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구나!’만을 알려주는 대화의 방식. [본문으로]
  11. 곧, ‘무엇을 찾아냈는가?’ 보다 ‘그것을 어떻게 구했는가?’를 검증한다. [본문으로]
  12. 스승이 먼저 지적 능력의 평등을 알고 있지 못하다면, 학생에게 어떤 앎을 전달하는 데 주력하게 될 것이다. [본문으로]
  13. “아이는 관례와 미신에서 빼내져야 하지만, 그의 활동과 조건으로 되돌려 보내져야 한다.” (p.75) [본문으로]
  14. 모든 지식은 잘 정리된 설명의 질서 속에서만 전달될 수 있다. 그러한 설명의 방법을 구사할 수 없는 가장이 아이에게 가르칠 수 있는 것은 없다. 즉, 가장이 무엇을 하는지조차 유식한 스승에 의해서만 가르쳐질 수 있는 것이 된다. (ex. “아버지가 농부이기는 한데, 씨를 뿌리는 시기는 학교에서 배웠어요.”) 한편, 가장이 할 수 있는 것은 학생에게 “이야기를 해 주거나 모범을 보임으로써 자식에게 그의 조건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 덕을 가르치는” 것이다. (p.76) 이것이 왜 가장의 역할을 고정하는 것으로 이어지는지는 글만 읽어서는 잘 모르겠다. [본문으로]
  15. 지적 능력의 질적 차이는 없다. 곧, 모든 인간 활동은 같은 종류의 지능이 작용한 결과이지, 누구는 할 수 있고 누구는 할 수 없는 활동은 없다. 단지 언어를 이해하고, “너는 이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니?” 하는 질문에 주의 깊게 대답할 수만 있다면 지능은 발현될 수 있다. [본문으로]
  16. 어느 날 중학교 수학 시간에 A선생님이 “내가 리만 가설을 증명했어요” 하고 떠들어댄들, 우리로서는 그것이 맞는 말인지 틀린 말인지 검증할 길이 없다. “A선생님은 정말 똑똑해” 하는 학생들의 평가도 따라서 별 가치가 없다. A선생님의 유식함은 단지 그보다 더 유식한 사람들, A선생님의 유식함을 검증할 수 있는 더 유능한 사람들에 의해서만 검증될 수 있을 따름이다. 이때 A선생님은 바보가 된다 (A선생님이 알지 못하는 것을 아는 더 유식한 사람들이 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