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기호의 폭력으로 《데미안》읽기

CucuClock 2023. 9. 28. 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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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의 폭력으로 《데미안》읽기[각주:1]

이동구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관통하는 한 문장을 꼽으라면 이것이겠다. 소설에서 주인공 싱클레어가 겪는 모든 방황과 고뇌의 과정은 모두 알 껍질 밖의 세계를 향해 있다. 그리고 그 과정은 고통 없이는 설명될 수 없는 것으로서 말 그대로 하나의 투쟁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껍질 밖의 세계는 다름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고 그의 오랜 친구 데미안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은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다.’[각주:2] 이 문장은 싱클레어의 체험이 그 한 사람의 이야기이면서도 우리 모두의 이야기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싱클레어의 체험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이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천천히 생각해 보는 일은 독자에게 큰 의미를 가질 것이다. 헤세의 《데미안》은 수많은 상징과 의미심장한 이야기들로 가득한 소설인 만큼, 이때 소설을 집중해서 읽어낼 수 있는 테마가 있다면 독해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질 들뢰즈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대하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독해하면서 주인공이 겪는 배움의 과정을 추적하는 동시에, 그것으로 종래의 재현철학에 대한 비판을 시도한 바 있다. 그 중요한 비판이 이루어지는 텍스트 《프루스트와 기호들》에는, 배움이란 결코 원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사유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기호들의 폭력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들뢰즈의 통찰이 잘 담겨 있다. 헤세의 《데미안》 역시 배움과 성장에 대한 이야기다. 《데미안》에는 이 배움의 비자발성이 어떻게 통일성과 활력을 불어넣고 있는가?

 

 들뢰즈는 배움이란 기호의 힘을 따르는 일이라고 설명한다.[각주:3] 이때 들뢰즈가 분석의 대상으로 삼는 ‘기호’는 (우리가 일상 언어에서 사용하는 것과 같은) 상징적이고 언어적인 질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우연한 마주침의 대상으로서 우리에게 사유할 것을 강요하는 이질적인 것 일반을 가리킨다. 그리고 그것이 새로운 사유를 시작할 것을 강요하고 그 강요가 비자발적으로 일어나는 한에서 기호는 하나의 ‘폭력’인 것이다. 다시 말해 배움이란 기호와의 비자발적인 만남을 통해 폭력적으로 이루어진다. 감성에 주어진 기호의 폭력이 지성에 전달되고, 지성은 마침내 그것이 무엇인지를 사유하기 시작한다. 각각의 인식 능력들의 조화 (공통감)가 깨지고 사유를 통해 새로운 일치가 발생한다.[각주:4] 이 잔혹한 과정이 ‘배움’이다. 이것에 대별되는 것이 ‘사유 이미지’다. 사유 이미지는 사유에 앞서 이미 전제된 것으로서, ‘항상 미리 전제되어 있는 좌표, 역학, 방향 체계’이다.[각주:5] 사유의 독단적 이미지 안에서, 이질적인 것으로서의 기호는 익숙한 사물에 대한 ‘재인’으로 환원된다.[각주:6] 지성이 이미 가지고 있던 답이 기호가 발생시킨 차이를 제거한다. 사유 이미지 아래에서 배움은 발생하지 않는다. 다만 매끄럽기만 한, 지성에 의해 미리 준비된 ‘명확하고 객관적이고 잘 다듬어진 의미’일 뿐이다.[각주:7]

 

 사유 이미지는 우리를 자발적인 대화, 노동, 철학으로 이끈다.[각주:8] 그것은 기호에 의해 주어지는 폭력 없이도, 우리가 무언가를 ‘알고자’ 하면 그것을 ‘알’ 수 있다는 기성의 믿음에 근거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앞서 살폈듯 ‘지성적이기만 한’ 진리를 낳을 뿐이다. 그것이 설명하지 못하는 것들은 실망을 낳는다. 대화, 노동, 철학에 참여하지 않음으로써 허비된 것으로 여겨지는 시간 (곧, ‘잃어버린 시간’)은 실은 기호의 폭력을 담지하는 한에서 대화, 노동, 철학의 시간보다 더 큰 배움을 낳는 시간이다. 배움을 위해 따라야 할 미리 정해진 방법이란 없다. 배움은 준비되지 않은 채 마주치게 되는 기호들이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답들을 모두 와해시키면서 발생한다. 역설적이게도 배우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배움이 발생하는 것이다. 《데미안》의 이야기는 아늑하고 밝은 세계에서 시작한다. 부모님, 자애로움과 엄격함, 맑음과 깨끗함, 누이들의 밝은 미소가 있는 세계. 밝은 세계에 속하지 않는 모든 것은 축축하고 어두운 세계의 것이다. 술 취한 사람들, 새끼 낳는 암소, 도둑과 공장의 세계.[각주:9] 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의 이분법은 모든 것을 설명한다. 밝은 세계에 속하지 않는 모든 것은 어두운 세계에 속한다. 밝은 세계가 지시하는 것은 달콤하고 추구할 만한 것이고, 어두운 세계에 속하는 것은 속죄와 고해의 주제가 되는 것이다. ‘천사라면, 분명 그래야 했으리라!’[각주:10]

 

 이러한 가운데 싱클레어의 밝은 세계에 프란츠 크로머가 침범해 들어온다. 싱클레어의 거짓말이 촉발한 크로머의 협박은 그의 밝은 세계에 대한 최초의 도전이었다.[각주:11] 밝은 세계의 법칙은 싱클레어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다. 싱클레어는 밝은 세계의 법칙이 설명하지 못하는 것에 처음으로 직면한다. 그러나 싱클레어는 아직 밝은 세계에서 ‘밝은’이라는 사유 이미지를 떼어 내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그는 사건이 해결된 뒤 부모님께 고해를 하고, 밝은 세계에의 의존을 택하며 다시금 순종적으로 된다. 그러나 이때의 경험은 분명 싱클레어에게, 배움과 진리 찾기의 근본을 이루는 ‘실망’이 고개를 드는 첫 번째 순간이다.[각주:12] 밝은 세계의 붕괴는 뜻밖에도 싱클레어의 내면으로부터 시작된다.[각주:13] 허용된 밝은 세계에서는 은폐되고 축소되어야 하는 것, 성에 대한 감정이 눈을 뜬다. ‘한때 프란츠 크로머였던 것이 이제는 내 자신 속에 박혀 있다.’[각주:14] 이제 밝은 세계의 무능력이 똑바로 고개를 쳐든다. 자기 안의 욕망과 싸우는 싱클레어에게 데미안이 건네는 말은 그것을 잘 드러내 주는 것 같다. ‘세계는 다른 것으로도 이루어져 있어. 그런데 다른 건 죄다 그냥 악마한테로 미루어지는 거야. … 그러니까 우리는 신에 대한 예배와 더불어 악마 예배도 가져야 해.’[각주:15] 인간의 추한 모습과 욕망은 밝은 세계의 그것보다 더욱 단단히 이 세계를 지탱하는 것일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을 밝은 세계의 사유 이미지는 너무도 간단히 악마에게로 전가해 버리는 것이다! 밝은 세계의 대화, 노동, 철학이 말하지 않는 것이 싱클레어의 안에서 꿈틀거린다. 데미안이 내놓는 카인과 예수 옆의 도둑에 대한 해석은[각주:16] 욕망과 더불어 폭력적으로 싱클레어를 알 수 없는 것이 주는 고통으로 몰아넣는다. 밝은 세계의 법칙은 붕괴했다.

 

 싱클레어는 이제 욕망에 이끌린다. 술을 마시고 그가 이전에 냉소를 보내던 것에 빠진다. 밝은 세계의 의례와 음성은 이제 즐거운 것이 못 된다. 싱클레어는 밝은 세계의 ‘저녁과 휴일의 나날이 어서 끝나기만을 바랐다.’[각주:17] 대신 그는 그의 관심을 끄는 소녀에게 베아트리체라는 이름을 주고 그녀에 대한 예배를 시작한다. 이전의 밝은 세계에서 얻은 실망을 보상받기 위해 그는 주관의 영역에서 하나의 새로운 의례를 창조하는 것이다. 그는 정결함을 추구하여 무너진 밝은 세계를 새로 세우고자 한다. 그는 베아트리체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림을 그리고 베아트리체에 대한 숭배 의식을 치르는 동안 싱클레어는 더없는 안정을 느낀다. 그런데 웬일인지 완성된 그림은 데미안을 닮았다. 그가 방황 뒤에 새롭게 추구하게 된 정결함의 끝에는 사유의 기폭제, 안정의 파괴자, 차이의 창조자로서의 데미안이 있는 것이다. 싱클레어가 좇던 안정의 이상은 데미안과의 조우로 깨어진다. 방황의 시간 끝에 마주하는, 그림으로서 육화한 데미안의 얼굴은 싱클레어에게 오래 전 보았던 어떤 문장—오래 전 자신의 집 현관에 붙어 있던 새의 문장(紋章)[각주:18]—을 떠올리게 한다. 그것에 대해 부단히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으로서 떠오르는 새의 문장은 그 무엇에 의해서도 대답될 수 없는 질문을 던지는 하나의 폭력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의 이름은 압락사스.’[각주:19] 싱클레어가 그려 보낸 새 문장에 대한 답장으로 데미안은 이 문장을 보내 왔다. 압락사스는 ‘신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의 결합이라는 과제를 지닌 어떤 신성의 이름’이다. [각주:20]데미안에 의해 알 수 없는 것으로서 폭력적으로 던져진 ‘압락사스’는 싱클레어 안에 어떤 영상을 불러일으킨다. 베아트리체는 일찍이 가라앉아 버렸다! 꿈속의 그 영상은 어머니였고, 연인이었고, 악마였고 창녀였다. ‘나는 그것들의 다스림을 받았다. 그것들에 의해 살았다.’[각주:21] ‘문장’이라는 기호가 다시 되살아나서 싱클레어 안의 사랑에 대한 동경을 되살려 낸다. 그는 그저 ‘그 영상의 인도에 맹목적으로 따라가야 한다는 임무를 느꼈다.’[각주:22] 이 경험에서 싱클레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압락사스를 생각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는 그 어떤 사유 이미지도 없다. 싱클레어는 그 거칠게 주어진 것을, 그것이 거칠게 주어진 것이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해석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피스토리우스와의 우연한 만남에서 싱클레어가 그와 주고받는 대화는 얼마간 압락사스 기호 해독에 도움이 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압락사스는 그 모든 것을 뛰어넘어 싱클레어를 몰아붙이는 것이다. 설명될 수 없는 것을 미련하게도 설명해 보려는 태도에 싱클레어는 자기 안에서 끓어오르는 저항을 감지한다. ‘지금 말씀하시는 것, 그건 참 빌어먹게 골동품 냄새가 나네요!’[각주:23] 대화를 통해 기호가 유발하는 차이를 해소하려는 알량한 시도가 어떻게 실망으로 이어지는지 싱클레어는 안다.[각주:24]

 

 싱클레어는 이제 꿈 속의 영상을 똑바로 그리기 시작한다. ‘그림이 어찌나 나의 안으로 들어가 버렸는지 그것을 나 자신과 갈라놓을 수 없었다. 마치 그림이 온통 나 자신이 되어버린 듯이.’[각주:25] 중요한 것은 자신에 이르는 길이지 그것을 매끄럽게 포장하려는 시도가 아니다. ‘다른 모든 것은 반쪽의 얼치기였다. 시도를 벗어남이고, 패거리의 이상으로의 재도피이고, 무비판적 적응이자 자기 자신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새로운 세계의 건설, 밝은 세계로의 귀환 시도... 이 모든 것을 뛰어넘는, 이제껏 없었던 폭력적인 강도로 압락사스가 밀고 들어와 싱클레어와 하나가 된다. 비자발적으로 마주한 불확실성, ‘그 뜻을 마음속에서 느끼고 그것을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드는 것, 그것만이 나의 직분이었다. 오직 그것만이!’[각주:26] 싱클레어에게는 아무런 권리가 없다. 그저 ‘스스로 갖겠다고 원할 수 있는 건 오직 자신의 운명뿐이었다.’[각주:27] 

 ‘내 운명이 나를 끌어당기고 있음을 나는 감지했다.’[각주:28] 꿈속의 영상, 그림 속의 영상, 압락사스, 어머니이자 악마이자 연인이고 창녀인 것을 찾아 싱클레어는 여행을 떠난다. 이제 사유하는 것은 밝은 세계의 법칙, 베아트리체 숭배의 의례, 그러니까 그가 원래 가지고 있던 답들이 아니라 싱클레어 그 자신이다. 그는 어려서 데미안을 원망하고 그로부터 고통받았으나 마침내 더없는 기쁨으로 데미안을 다시 만난다. 데미안은 그를 자신의 어머니 에바 부인에게로 데려가고, 싱클레어는 끝내 자신이 그토록 그리던 압락사스의 모습을 그녀에게서 발견한다. 그는 이제 그의 운명 압락사스를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각주:29] 숭배할 것은 종교가 내려 주는 답이 아니라 이 참을 수 없는 불확실성, 그리고 그것이 가져올 미래다. ‘그것이 가져올 어느 것에나 우리가 준비되어 있음을 발견할 만큼 우리들 누구든 그토록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되고, 자기 속에서 작용하는 자연의 싹의 요구에 그토록 완전히 따르며 기꺼이 살리라는 것.’[각주:30] ‘싱클레어, 당신의 사랑은 나에게 끌리고 있어요. 언젠가 내가 아니라 당신의 사랑이 나를 끌면, 그러면 내가 갈 겁니다.’[각주:31] 에바 부인이 싱클레어를 끌어당기는 것처럼, 싱클레어도 에바 부인을 끌어당기기 시작한다.

 

 싱클레어가 가진 답은 앞으로도 또 다른 크로머, 베아트리체, 압락사스와 ‘마주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제 그 무엇으로부터도 배울 준비가 되어 있다. ‘이제 그와 완전히 닮아 있었다. 그와, 내 친구이자 나의 인도자인 와.’[각주:32] 싱클레어의 배움은 그도 모르는 사이에 그의 모든 것을 비틀고 부수며, 폭력적이면서도 비자발적으로 이루어져서 그를 압락사스, 에바 부인, 데미안에게까지 데리고 갔다. 자발적으로 앎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믿음은 역설적이게도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데 무능력하다. 가지고 있는 답들이 모두 무너지고, 같다고 생각했던 것을 다른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기호의 폭력을 받아들일 때 알 껍질에 균열이 생긴다. 방황과 고통으로 잃어버린 시간은 되찾는, 되찾은 시간이 된다. 그 시간은 모두 하나의 본질을 향해 있었다. 

 

 사람은 아는 것만으로는 살 수 없다. 한 사람, 나아가 세계를 지탱하는 것은 우리가 아는 것이 설명해줄 수 없는 거친 것들과 축축한 것들이다. 사유 이미지는 우리가 결코 ‘이상이 될 수 없는 이상’에 매달리게 한다. 얼마나 많은 소중한 거친 것들이 사유 이미지 속에서 매끄럽게 다듬어지고 은폐되었는가! 이미지들이 설명해 내지 못하는 기호들과 차이들을 똑똑히 보고 그들을 해방시켜야 한다. 세상에는 설교자가 아니라 구도자만이 필요할 뿐이다. 자기 자신에 이르는 길이란 ‘아가리 닥치고 배 깔고 엎드려 생각’만[각주:33] 해서는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안다고 믿었던 것을 모두 깨부술 때,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압도적인 것에 마주쳤을 때 속성을 고정하는 말하기, 하기 싫음의 상태, 값싸게 얻어지는 지식에 대한 믿음, 자발적 무사유와 무기력의 상태는 사라지고 사랑만이 남는다. 결국 《데미안》에서 자신에 이르는 길이란, 세계의 변화무쌍함과 경이로움을 온 몸으로 끌어안는 일이라고 하겠다.

 

 

 

 

참고 문헌

 

김상환, “초월론적 경험론이란 무엇인가?”, 철학과 현실, 73, 2007, pp.254-266.

 

류종우, “들뢰즈 철학에서 기호의 폭력에 따른 배움의 발생”, 철학논집, 37, 2014, pp.261-290.

 

안 소바냐르그, 《들뢰즈, 초월론적 경험론》, 성기현 옮김, 서울: 그린비, 2016.

 

질 들뢰즈, 《프루스트와 기호들》, 서동욱, 이충민 옮김, 서울: 민음사, 1997. 

 

헤르만 헤세, 《데미안》, 전영애 옮김, 서울: 민음사, 2016.

 

 

 

 

 

  1.  《데미안》의 번역본 텍스트는 민음사의 전영애 역을 이용했다. 앞으로 《데미안》 소설로부터의 인용은 제목과 쪽수를 표시하는 것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헤르만 헤세, 《데미안》, 전영애 옮김, 서울: 민음사, 2016. [본문으로]
  2.  《데미안》, p.9. [본문으로]
  3.  안 소바냐르그, 《들뢰즈, 초월론적 경험론》, 성기현 옮김, 서울: 그린비, 2016, p. 203. [본문으로]
  4.  여기에서 들뢰즈는 칸트가 인간의 각 인식 능력에 대해 이름붙인 것과 같은 의미에서 ‘감성’이나 ‘지성’ 따위의 용어들을 쓰고 있다. 감성은 우리가 대상에 의해 촉발되는 자극을 받아들이는 수동적인 능력이고, 지성은 자신이 만들어낸 개념을 통해 감성이 받아들인 자극을 종합하는 능동적인 능력이다. 칸트는 각각의 인식 능력이 각각의 주도적인 영역을 가지고 있고, 경험의 주체는 그것을 조화롭게 작동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들뢰즈는 인식 능력이 항상 조화롭게 작동한다는 칸트의 이 믿음을 ‘공통감의 공준’이라며 비판했다. 인식 능력은 언제나 조화롭게 일치된 채로 작동하는 공통감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대상에 의해 교란되고 고장날 수 있는 것이다. ‘배움’이란 경험의 주체가 이 교란된 인식 능력을 일치시키는 새로운 조합을 찾아 나설 때 발생하는 것이다.
    Ibid., p.93-124. [본문으로]
  5.  사유 이미지는 사유에 가해지는 자극을 제거하면서 사유가 폭력에 노출되는 것을 막는다.
    류종우, “들뢰즈 철학에서 기호의 폭력에 따른 배움의 발생”, 철학논집, 37, 2014, p.263. [본문으로]
  6.  ‘재인’은 어떤 이질적인 대상을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알아보는 것을 뜻한다. 곧, 그것은 새롭게 감각적으로 주어진 것 (감성의 대상)을 기억이나 지성의 대상으로 만들어 그 새로움을 익숙한 것으로 환원시킬 수 있다는 믿음, 혹은 실제로 그렇게 환원시킴이다.
    김상환, “초월론적 경험론이란 무엇인가?”, 철학과 현실, 73, 2007, p.261. [본문으로]
  7.  질 들뢰즈, 《프루스트와 기호들》, 서동욱, 이충민 옮김, 서울: 민음사, 1997, p.47. [본문으로]
  8.  들뢰즈는 ‘대화, 노동, 철학’이라는 말을 기호의 폭력에 노출되는 것과 대립되는 활동을 지시하기 위해 쓰고 있다. 사람들은 대화를 통해 미리 만들어진 관념을 교환하고, 노동을 통해 전달 가능한 진리들을 발견하고자 하며, 철학을 통해 ‘미리 생각해 놓은’ 개념들을 배운다. 이 활동을 통해 사람들은 ‘객관적인 의미들의 질서와 내용’을 발견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하나의 사유 이미지로 만든다. 곧, 이 활동들은 ‘알고자 하면 알 수 있다’는 믿음을 부당하게 포함하는 활동들이다.
    Ibid., p.58-59. [본문으로]
  9.  《데미안》, pp.10-12. [본문으로]
  10.  Ibid., p.14. [본문으로]
  11. 싱클레어는 크로머 일행과 어울리기 위해 자신이 과수원에서 사과를 훔쳤다는 내용의 거짓말을 자랑스러운 듯 친다. 크로머는 이것에 대해 싱클레어를 과수원 주인에게 일러바치겠다며 협박한다.
    Ibid., 16-57.  [본문으로]
  12. 들뢰즈는 실망이 사유 이미지 쇄신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고 썼다. 그것은 진리 찾기와 배움의 근본을 이루는 것이다. 우리는 대상이 우리에게 일러 줄 것으로 기대했던 비밀을 일러주지 않음을 알았을 때 그것에 실망하게 된다. 실망을 보상받기 위해 우리는 실망의 감각을 주관의 영역에서 보상받고자 하거나, 우리를 실망하게 한 대상에 보다 알맞은 기호들에 민감해진다. 뒤에서 살피겠지만, 《데미안》에서도 실망을 주관적으로 보상받으려는 시도와 마침내 기호를 똑바로 보게 되는 배움의 과정이 모두 드러난다.
    질 들뢰즈, op.cit., pp.53-68. [본문으로]
  13.  싱클레어의 내면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감성에 대해 폭력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싱클레어는 자기 안에서 끓어오르는 욕망에 대해 설명할 그 어떠한 수단도 갖지 못한 채 그 기호에 순전히 감성적으로, 그리고 폭력적으로 노출되는 것이다. [본문으로]
  14.  《데미안》, p.66.  [본문으로]
  15.  Ibid., p.83. [본문으로]
  16.  데미안은 수업 시간에 등장하는 신화들에 대해, 싱클레어가 이전에 접하지 못했던 파격적인 해석들을 내놓는다. 예컨대 하나님이 최초의 살인자 카인에 대해 내린 표식이 실은 카인의 강직함을 두려워한 약한 이들이 자신들의 무능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붙인 것이라거나, 예수와 함께 죽음을 맞는 두 도둑들 가운데 끝까지 회개하지 않은 도둑이 끝까지 도망가지 않은 개성 있는 자라는 식이다. 이들은 모두 밝은 세계에 속한 사람들이 내놓을 법한 대답들을 깨부술 만한 것으로, 싱클레어에게는 하나의 폭력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Ibid., pp.39-42, 82-83. [본문으로]
  17.  Ibid., p.105. [본문으로]
  18.  싱클레어와의 첫 만남에서, 데미안은 싱클레어 집 위에 붙어 있는 문장을 보고 그것이 흥미롭다고 말한다. 욕망으로 괴로워하던 중 우연히 갖게 된 데미안과의 만남은 싱클레어로 하여금 과거를 돌아보다 그것의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싱클레어는 그 문장의 새가 자기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꿈을 꾸고, 그 새의 그림을 그려 데미안에게 보낸다. 그것에 대한 답으로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압락사스를 알려 주는 것이다.
     Ibid., p.38, pp.118-119. [본문으로]
  19.  Ibid., p.123. [본문으로]
  20.  Ibid., p.125. [본문으로]
  21.  Ibid., p.130. [본문으로]
  22.  Ibid., p.128. [본문으로]
  23.  Ibid., p.167. [본문으로]
  24.  그러나 피스토리우스와의 만남이 없었더라면 압락사스의 폭력이 온전히 드러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여기에서도 ‘실망’은 배움과 진리 찾기의 출발점으로서 기능하고 있다. 싱클레어가 피스토리우스와 헤어진 이후에도 그를 ‘인도자’로 부르는 이유는 바로 이것일 것 같다. ‘마침내 다시 저를 제 자신에게로 이끄는 인도자가 왔지요. 그 이름은 피스토리우스예요. 그때야 저는 왜 저의 소년 시절이 그토록 막스 형과 결합되었는지, 왜 제가 그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는지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Ibid., p.190. [본문으로]
  25.  Ibid., p.159. [본문으로]
  26.  Ibid., p.172. [본문으로]
  27.  Ibid., p.175. [본문으로]
  28.  Ibid., p.178. [본문으로]
  29.  들뢰즈는 《프루스트와 기호들》에서 ‘우정’과 ‘사랑’을 비교하면서, 가장 평범한 사랑일지라도 그 어떤 위대한 우정보다 기호의 측면에서는 풍부하게 된다고 쓴다. 사랑받는 것은 해석되어야 할 어떤 세계를 함축하기 때문이다. 우정의 관계에 있어 기호의 폭력은 별 중요한 위치를 부여받지 못한다. 반면 사랑받는 것은 모든 명시적 의미보다 심오하고 무언의 해석을 요구하는 기호를 방출한다. 압락사스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것이 방출하는 기호와 그것이 자신에 대해 가하는 폭력에 따르고, 자기 안에 새로운 배움이 자리잡는 것을 막지 않겠다는 결의와도 같다.
    질 들뢰즈, op.cit., pp.26-34, 58-59. [본문으로]
  30.  헤르만 헤세, op.cit., p.196. [본문으로]
  31.  Ibid., p.200. [본문으로]
  32.  데미안을 의미한다. Ibid., p.222. [본문으로]
  33.  Ibid., p.138.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