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주제별 분류)/현상학

단 자하비, ⟪현상학 입문⟫_제1부 기본 주제들

CucuClock 2023. 8. 15.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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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 선배의 추천으로 읽게 되었고, 빠르게 정리하면서 발제를 위한 요약 형식으로 남겼다.

이번 방학 안에 같은 작가의 ⟪후설의 현상학⟫도 이런 형식으로 정리해 소장할 계획이고, 그 뒤에는 이남인 선생님의 ⟪현상학과 해석학⟫을 시작으로 깊이를 더해 나갈 계획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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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2023.04.18. ~ 04.23.

 

제1장 현상 (04.18.)

 현상학은 현상에 대한 학문이다. 단순한 대상에 대한 일상적 경험도, 그 대상이 우리에게 어떤 방식으로 나타나는가 하는 점을 고찰하자면 현상학적 탐구의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다.현상학은 “대상들의 내용보다는 나타나는 방식에 관심을 둔다” (22면): 다양한 유형의 주어짐givenness에 대한 학으로서의 현상학.

 

자명종 시계 

 이해를 돕기 위해, 자명종 시계가 어떻게 지각적으로 나타나는가를 살펴보자. 

1) 우선 우리는 그것을 항상 관점적으로 지각한다. 한 면을 지각하자면 지각할 수 없는 다른 면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지각될 수 없는 다른 면이 자명종에 속하지 않는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지각 경험은 결과적으로 현전과 부재의 상호작용을 포함한다.” (23면) 우리가 보는 것은 보는 것의 의미를 촉발하는 어떤 지평horizon 안에서 보는 것이다. (여기에서 ‘지평’이란 단순히 지각되지 않는 한 면만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대상이 지각되는 더 큰 맥락 전체를 말한다. 2), 3), 4)에서 나타나는 의식의 장, 신체, 시공간 따위 모두가 어떤 지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 “자명종 시계를 보고 있어도 나의 의식의 장場은 소진되지 않는다.” (24면) 내가 자명종에만 정신을 집중한다고 해서 그것을 비추는 조명, 자명종의 위치 따위가 지워지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단지 토대ground로서 의식될 뿐이다. 어떤 대상은 배경에 속하다가도 내가 정신적으로 움직이면 자명종과 같이 정신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3) 자명종 시계가 관점적으로 나타나려면, 내가 어떤 공간상의 한 지점에서 나의 신체를 가지고 그 시계를 지각하고 있어야 한다. “순수하게 지적인 관점은 없고 아무 장소도 없는 데서 비롯한 관점도 없으며, 체화된 관점만이 있을 뿐이다.” (25면)

4) 우리는 또한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것을 넘어 대상에 대한 더 깊이 있는 탐구로 넘어가고자 하는데, 그를 위해 우리는 자명종을 만져도 보고, 들어서 더 자세히 보기도 하고, 온도를 느껴 보기도 할 것이다. 지각적 탐구는 완전무결한 정보를 습득하는 문제이기보다 신체적 활동이다. 대상을 지각하는 데는 시간이 또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우리는 자명종의 한 면에서 다른 한 면으로 시선을 옮길 때 단절적이기보다 시간의 경과에 따라 그렇게 한다. 우리가 어떤 것을 기억하거나 어떤 것을 기대할 때, 과거의 경험과 미래에 대한 추측이 작용한다.

5) 마지막으로 나에게 나타나는 자명종은 나에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기도 하다. “그것은 타자들도 관찰하고 사용할 수 있는 만큼, 즉 바로 그만큼만 나에게 공적 대상으로 주어진다.” (27면)

 

나타남과 실재

 전통적으로 철학에는 그 자체로 있는 대상과 우리에게 나타나는 대상을 구분해 왔고, 대상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주관적이고 현상적인 것을 넘어서야 한다는 아이디어가 있어 왔다. (더불어, 대상 자체만이 과학적으로 탐구될 수 있다는 아이디어가 또한 있어 왔다.) 그러나 현상학에서 “현상은 자신을 보여주고 드러내는 것이다.” (27면) 현상이 주는 것이 그 자체로 어떤 것이다. 현상학과 과학의 영역은 서로 다른 현시의 방법에 따른 구분이지, 철저히 분리된 영역이 아니다. 

 

 현상학자들은 우리에게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세계가, 지각적으로 일상에서, 그리고 과학적 분석에서 모두 요구되는 실재성과 객관성을 모두 갖추고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 현상학자들은 접근할 수 없고 파악할 수 없는 저편으로 말미암아 객관적 실재성을 정의하기보다 객관성을 지정할 올바른 장소가 저편이 아닌 나타나는 세계 내에 존재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28-29면)

 

제2장 지향성 (04.18.)

 의식은 항상 어떤 것에 ‘대한’ 의식이고, 따라서 방향성, 즉 지향성intentionality를 갖는다. 의식은 이렇게 “의식에 고유한 자신을-넘어-지시”한다. (31면) 지향성 개념은 경험적 주체성과 세계의 대상 사이의 차이와 관계를 명료하게 드러낸다. 

 대상은 항상 우리에게 일정한 방식으로 현전한다. 우리가 현전화 자체의 형태를 변형하더라도 (곧, 어떤 것을 믿거나 부정하거나 상상하거나...) “지향적 경험의 각 유형은 독특한 방식으로 그 경험의 대상을 향한다.” (33면)

 

지각과 상Perception and Pictures

  우리가 같은 케이크를 지향하더라도, 그 케이크가 자신을 보여주는 방식은 매우 다를 수 있다. 케이크를 막연히 떠올려 보거나, 케이크의 사진을 들여다보거나, 실제로 케이크의 맛을 보기... 우리는 대상을 언어적으로, 상적으로 혹은 지각적으로 지향할 수 있다. 

 지각적 작용은 “우리에게 대상 자체를 그 신체적 현전 가운데 제공하는 유형의 지향”으로, 대상을 가장 직접적이고 ‘원래대로’ 보여주는 방식이다. 이것은 지각적 작용이 다른 작용들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말하기보다, “지각적 지향성이 다른 복잡한 형태의 지향성..보다 더 기초적이라는 것을 뜻한다.” (34면) 언어적 작용은 관습적 연상 작용을 통해, 상적 작용은 사태와 얼마간 유사성을 갖는 표상에 의해 사태를 지향한다. 

 상적 작용의 경우에서는, 어떤 기호가 어떤 대상을 임의적으로 참조하는 언어적 작용과는 달리,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의 이미지로 존재해야 한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후설에 따르면, 하나의 물리적 대상은 다른 하나의 그림으로 기능하되 그것이 관람자에 의해 특정한 방식으로 파악되는 경우에만 다른 것을 묘사할 수 있다. 예컨대 그림을 보고 어떤 대상을 연상하려면 우리는 눈 앞에 물리적으로 현전한 그림 자체는 초월해야 하는 동시에, 그것이 실제적 현전과는 다른 어떤 것임을 알아야 한다.

 

표상과 인과성

  의식은 대상과 관련되고, 자신이 아닌 다른 사건을 향해 있다. 마음은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는가? 

 

하나의 가능한 관점은 다음의 것이다: 경험은 순전히 주관적인 것이다. 일상적 지각에는 정신 외부의 대상, 그리고 정신 내부의 표상이라는 두 종류의 존재자가 관여한다. “전자에 대한 나의 접근은 후자에 의해 매개되고 가능해지게 된다.” (38면) 양자는 어떤 접속 기관 (예컨대 감각 기관)을 통해 매개된다. 

 

 그러나 모든 현상학자는 이 관점을 배척한다.

 

비판1) 표상적 매개의 도입에 대한 비판

 (1) 의식 외부의 대상과 의식 내부의 주관을 구분하는 순간, 우리는 의식 밖에 있는 것이 어떤 것인지 질서정연하게 알 수 없게 된다. (2) 또한, 우리는 지각한 것을 통해 다른 것을 지향하기도 한다. (예컨대, 건물 사진을 보고 그 건물을 지향하는 경우,) 지각으로 주어진 것은 다른 것에 대한 기호나 상으로 기능하지 않는다. 우리가 어떤 표상적 속성을 얻는 것은 어떤 것에 대한 지각 다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일 그렇다면, 지각의 표상 이론은 그것이 설명하려는 것을 전제로 삼기 때문에 거부될 수밖에 없다.” (38면) (곧, 모든 표상이 정신 외부의 대상으로 인해 매개된다면, 이미 지각된 뒤에 그 표상적 속성을 얻는 상이나 기호를 설명할 수 없다.)

 

비판2) 인과성을 기반으로 지향성을 설명하려는 시도에 대한 비판

 (1) 쌍안경으로 언덕을 볼 때, 언덕은 내 시각에 인과적으로 영향을 줄 수는 있지만 그것은 오직 말단부의 원인일 뿐이다. (예를 들어, 왜 쌍안경의 렌즈를 지각하지는 못하는가?) (2) 더불어 인과성은 지향성의 양면성을 포착할 수 없다. 어떤 대상은 언제나 어떤 맥락과 환경 속에서 우리에게 주어진다. 대상은 인과적으로 나의 지각 체계에 영향을 줄 수 있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어떤 대상은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서, 어떤 상징으로서, 어떤 실천적인 방식으로 나에게 드러날 수 있다. (3) 또, 나의 물리적 주위세계에 현존하는 대상들은 내가 의식할 수 있는 것의 작은 한 부분일 뿐이다. 인과적으로 주어지지 않는 허구적, 미래적, 이념적 대상들이 어떻게 나에게 인과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되는가?

 

 이상의 이유에서 1) “우리는 지각적 경험을 정신적 표상으로, 우리가 마주하는 일종의 내적인 영화 스크린으로 인식하는 일을 멈춰야 한다.” 지각적 경험은 우리가 대상을 현전화하는 여러 방법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2) “더 나아가 마음-세계 관계를 인과적 용어로 설명하려는 생각도 버려야 한다.” (40면) 마음과 세계 사이의 관계는 대상들 사이의 관계와 동일시되어서는 곤란하다. 현상학에서 의식은 대상의 인과 관계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이고 파생되지 않은 지향성”으로 규정되며, 인과성보다는 의미가 기본 역할을 한다. 

 

마음과 세계

 의식의 세계-관련성은 그 본질의 일부다. 의식은 그 지향적 개방성과 관련하여 이해되어야 한다. 

 

현존재는 ... 자신의 일차적인 존재양식을 따라 언제나 이미 ‘바깥에’, 각기 그때마다 이미 발견된 세계에서 만나는 존재자 곁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현존재는 인식되어야 할 존재자와 함께 거하며 그 성격을 규정할 때에도 내적인 영역을 포기해버리지 않는다. ... ‘바깥에 있음’ 에서도 현존재는 ‘안에’ 있음으로 올바르게 이해된다. 다시 말해 그 자신을 세계-내-존재로 존재하는 자로 인식한다. (43면)

 

 하이데거가 주체성, 의식보다 ‘현존재Dasein’이라는 표현을 선호하는 이유도, 그것이 “우리의 존재가 세계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 세계에 관여되어 있음”을 잘 드러내 보이기 때문이다. 바깥-내부는 그렇게 간단히 구분되지 않는다. 

 대상은 우리에 대해 존재하고, 우리에 대해 타당한 것으로 구성constitution된다. 이때 ‘구성’이란 “대상의 현시나 나타남과 그 의미 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과정”으로 이해된다. “현상학의 과제는 처음부터 일상적 삶의 소박함과 결별하고 작용과 대상 간의 상관관계, 사유작용cogito과 사유대상cogitatum의 상관관계에 대해 주의를 환기하고 그것을 탐구하기 시작하는 데서 비롯되었다.” (45면) “현상학의 주요 관심사는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 사이의 이러한 관계를 정확하게 설명하는 것이었다.” (46면) 의식은 어떤 특유의 방식으로, 어떤 영역과 범주에서 어떤 것을 구성하는가? 세계 속의 주체, 또한 세계를 열어 밝히는 주체, 주체를 둘러싼 세계, 주체에 의해 밝혀지는 세계에 대한 학으로서의 현상학.

 이렇게 하여 현상학은 “우리의 세계를 이해하고 경험하는 방식, 대상과 그 나타남의 방식을 동시에 분석하게 된다.” (48면) 실재에 관한 모든 이해가 관점적이라면, 아무런 관점을 취하지 않는 세계에 대한 이해가 세계 자체에 더 가까운 것으로 받아들여질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오히려 어떤 관점에서 어떤 것이 우리에게 어떻게 드러나는가를 설명하려는 시도가 세계에 대한 더 나은 이해를 제공할 것이다.

 

실재론과 관념론

 현상학은 인식주관이 어떻게 세계에 대해 열려 있는가, 따라서 그것이 어떻게 순전히 자립적이지 않고 세계와 연관되어 있는가를 다룬다. 의식은 자신 밖의 대상과는 같은 본질을 갖지 않되, 그것에 대해 상관적이다. 

 

현상학의 초점은 마음과 세계의 교차점에 맞춰져 있는데, 그 둘 중 어느 것도 서로 분리되어 이해될 수는 없다. 우리는 우리의 세계-연관의 함수로서 우리로 존재하는 것이며, 의미의 근본적 맥락으로 이해되는 세계 또한 오직 그것과 우리의 연관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타자 없이 존재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 것은 전경foreground과 무관하게 배경background이 무엇이냐고 묻는 것과 같다.  (52면)

 

 

제3장 방법론적 고찰 (04.19)

 현상학적 방법이란 무엇인가?

 

에포케와 환원

 후설은 “특수한 괄호치기나 판단중지”로서의 에포케epoché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그는 이것으로 하여 우리가 ‘사태 자체’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해석1) 사태 자체로 돌아감이란, 우리의 선입견, 습관, 편견, 가정 등을 괄호치고 사태에 대한 정확한 기술에 힘써야 함을 말한다. 현상학의 과제는 기술적descriptive이다. 현상학은 특수한 현상의 유일무이함을 파악할 수 있도록 가능한 세세한 기술을 제공해야 한다.

 

해석2) 에포케란 “우리가 내면의 경험에서 지금까지 주목받지 못했던 양상을 주제화하고 기술할 수 있도록 우리의 관심 범위를 넓히는 것”이다. (55면) 곧, 지금껏 드러나지 않았던 주체의 삶과 양상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자하비에 따르면 두 해석 모두는 틀렸다. 위의 두 해석은 대상과 주체 사이의 상호관계를 탐사하려는 현상학의 “체계적인 야심”을 간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현상학을 개인의 경험이나 대상들의 구조들에 대한 개괄로 돌려 버릴 위험이 있다. 

 이것과 더불어 그가 소개하는 또 하나의 오해는, 현상학이 순전히 방법론적이거나 메타철학적인 논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에 따를 때 현상학에서는 실제로 존재하는 세계는 탐구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어떤 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만이 중요하다. 이것은 영향력 있는 해석이지만, 후설 이후 하이데거나 메를로-퐁티 등이 그들 자신의 현상학을 존재론과 연결시키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문제적인 것이 된다. 

 따라서 에포케를 이해하는 적절한 방법이란, “그것이 실재의 배제가 아니라 실재에 대한 특정한 독단적 태도 (곧 자연적 태도)를 중단시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59면) 자연적 태도란 세계가 그것을 마주하는 우리와 무관하게 존재한다고 보는 입장이다. 

 

이러한 태도를 유보함으로써 실재가 항상 특정한 한 관점이나 또 다른 어떤 관점에서 드러나게 되고 검토된다는 사실을 주제화함으로써, 실재는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이제 처음으로 철학적 탐구를 위한 대상으로 접근 가능한 것이 된다. (59면)

 

 곧, 에포케의 목표는 마음과 세계 사이의 근본적 상관관계를 드러내는 것이지, 마음 밖의 어떤 것도 알 수 없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다. 

 에포케를 채택한 이후 등장하는 방법이 초월적 환원transcendental reduction이다. 세계를 마음-독립적이지 않은 어떤 것으로 이해하자면, 이제는 대상에 대한 지향적 작용과 경험적 구조가 문제가 된다. 대상들의 논리와 의미, 그것이 나타나게끔 하는 지향성에 대한 평가. 

 “우리를 자연주의적 독단론으로부터 해방하고, 우리가 모두 일정 수준에서 구성의 과정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즉 우리 자신의 구성적 연관을 깨닫게 하는 것이 에포케와 환원의 목적이다.”

 

초월철학

 이러한 반성적 움직임의 긴요함을 역설하면서 후설은 자신이 초월철학의 전통에 속해 있다고 말한다. 초월철학은 어떤 것을 발명하거나 세계의 대상에 대해 일차적인 탐구를 진행하는 것에 그 관심이 있지 않고, 차라리 어떤 것이 실재로 간주되기 위한 조건에 집중한다. 예컨대 주체는 대상이 대상으로 나타날 수 있는 가능성의 필연적 조건이다. 

 에포케와 환원은 자연주의적 독단론을 물리치는 동시, “존재하는 것 자체로부터 어떤 것도 빼앗지 않으며, 존재자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하는 것도 아니다.” (63면) 다만 그것은 존재하는 것의 존재를 현전화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단순한 세계 내 대상 이상의 어떤 주체성을 발견할 수도 있다. 

 현상학은 이렇게 하여 자연적 태도, 일상적 실존, 평균적 자기이해를 넘어 주체성의 특별한 측면, 그리고 세계와 우리의 관계의 근본구조를 드러내고 탐구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한다. 하이데거가 일상적 실존과 대비되는 불안, 메를로-퐁티가 낯선 것, 역설적인 것으로서의 세계를 강조한 것도 이렇게 세계를 의문시하고, 대상이 우리에게 어떻게 현상하는가에 집중하려는 기획의 일부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제4장 과학과 생활세계 (04.20.)

 현상학은 “경험적이고 사실적인 특수성”보다 “우리의 경험을 특징짓는 본질적 구조, 이 경험과 구조의 상관관계, 이 둘의 연관성”을 탐구하는 데 그 초점이 있다: 지각이나 욕망 일반을 특징짓기. (71면) 

 우연하고 우발적인 것과 본질적이고 필수적 (필연적)인 것으로부터 구분해 내는 능력은 철학과 과학의 중심인 동시에 우리가 일상적으로 채택하는 능력이다. (칫솔의 색이 바뀐다고 해서 그것이 칫솔이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니다. 책의 위치가 바뀌었다고 해서 그것이 책이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니다. ...)

 

본질주의

  대상의 본질적 구조를 어떻게 찾아낼 것인가? 후설이 첫째로 제시하는 방법은 형상적 변경eidetic variation이다. 예를 들어 칫솔의 색, 재료, 모양 등을 바꾸어도 그것이 칫솔일 수 있다면, 칫솔의 본질에서 특정한 색, 재료, 모양 따위는 제거된다. 이렇게 하여 최종 결과는 어떤 것이 칫솔일 수 있게 해 주는 것이겠는데, 그것이 없다면 칫솔은 더 이상 칫솔이 아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무오류성에 대한 주장은 아니다. 그것은 잠정성과 추정성을 갖는 하나의 도구이다.

 둘째로 후설은 정밀한 본질과 형태론적 본질을 구분한다. 순수 수학이나 정밀과학에서는 문제를 매우 정확하게 정의하는 반면, 그 모호함 자체가 본질인 몇몇 문제들이 있다. “우리가 기하학에서 발견하는 것과 같은 정확성과 정밀성을 생활세계의 질료로 부과하려는 것은 후자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이다.” (73면)

 셋째로 현상학은 근본적인 주제에 관한 높은 수준의 일반성을 추구한다. “생활세계, 지향성, 체화, 시간성의 일반 구조는 무엇인가? 무엇이 지각과 상상을 구별하는가? 물리적 대상 자체는 무엇으로 특징지어지며, 그것은 수학적 존재자나 심리학적 과정과 어떻게 구별되는가?” (74면) 나타나는 대상과 관련되는 보편적 구조를 밝혀내기.

 이때 현상학이 밝혀내고자 하는 바를, 인종, 민족, 성별에 따른 불변하는 속성이 있다고 보는 비역사적 본질주의와 연결해서 이해하고자 해서는 곤란하다. “후설은 이러한 관념들이 얼마나 많은 역사적, 문화적 변화를 겪게 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75면) 동시에 현상학은 단일한 방법으로 설명되지 않는 복잡하고 다양한 존재론적 영역을 인정한다. 수학적, 정밀과학적 방법을 오로지 참되고 실재적인 것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환원 또는 제거

 환원주의자는 어떤 더 복잡한 부분을 덜 복잡한 부분으로 환원하여 그 환원된 부분을 체계적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예컨대, ‘x에 대한 의식은 어떻게 물리학, 화학, 신경생리학 등으로 환원될 수 있는가?’ 제거주의자는 의식 자체의 존재를 거부한다. 이들에 따를 때 자연과학의 원리를 통해서만 설명될 수 있는 것만이 실재한다. 이들의 과학적 자연주의는 “실재는 자연과학에 의해 수용된 (또는 수용될 수 있는) 존재자들, 속성들, 구조들만으로 구성된다”고 본다. (79면) 

 그러나 이 슬로건이 사회학, 인문학, 정치학의 과제를 만족스럽게 설명할 수 있을지는 의심의 여지가 있어 보인다. “그 슬로건이 참이라면, 엄밀히 말해 시리아에서 내전이 일어난 적이 없다는 결론을 내려야 할 것이다. ... 이런 식의 결론은 그 슬로건의 극단적인 불합리함을 우리에게 제시하지 않는가?” (80면)

 

생활세계

 현상학에서는 생활세계는 전이론적 경험세계로, 우리 모두가 일반적으로 의심하지 않는 세계이나 “역사적이고 체계적인 토대를 구성하는 과학에 의해 망각되고 억압”되어 왔으므로 복원이 필요하다고 본다. (81면) 앞에서 보았듯 “우리의 경험 세계는 그 나름의 타당성과 진리의 기준을 가지고 있으며, 과학의 승인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 외려 생활세계와 과학세계의 관계는 상호적인 것으로서, 하나가 다른 하나에 대해 영향을 주고 그 일부가 통합되기도 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제5장 더 깊이 파고들기: 표층 현상학에서 심층 현상학으로

 초기 후설의 지향적 상관관계에 대한 탐구는 정적 현상학static phenomenology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그러나 후설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어떻게 이해의 형태가 점진적으로 수립되는지, 그것이 어떻게 뒤따르는 경험에 영향을 끼치고 그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지를 검토했다.” 지향성의 시간적 생성, 대상성의 낮은 질서에서 높은 질서로의 이행 따위를 검토하는 이 현상학은 발생적 현상학genetic phenomenology로 불린다. 후설은 마지막 단계에서 세대간 형상학generative phenomenology라는 이름 아래 전통과 역사의 구성적 역할을 탐구하기에 이른다. 

 

세대성과 전통

 후설의 탐구에서 시간과 공간은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세계는 공간상에서 신체적으로 탐사된 대로 우리에게 주어지고, 지향 작용과 지향적 대상은 시간상에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가운데 그는 상호주관성과 공감 개념에 천착했고 그의 ‘자아론적 현상학’을 넘어 ‘사회학적 현상학’으로 이행하기에 이른다. 

 “후설의 마지막 글에서는 체화와 상호주관성, 그리고 시간성에 대한 주제들이 함께 소개되고 사고된다. 또한 상호주관성에는 통시적 차원이 있다. 궁극적으로 후설은 구성적 함축을 두기 위해 주체의 탄생을 살아 있는 전통과 관련해 고찰할 것이다.” (89면) 세계는 그 기원이 나의 밖에 있는 것, 역사적 과거 속에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세대적 망은 시간적 형태와 마찬가지로 나에게 불가분 속해 있다. 메를로-퐁티가 “후설의 초월은 칸트적 의미의 초월이 아니다”라고 말한 이유는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하이데거, 메를로-퐁티가 또한 지적하듯, “현상학적 반성을 따라 드러나는 것은 ... 타자성을 향한 개방성, 외재화의 운동이자 지각적 자기-초월이다.” (91면) 자기, 타자, 세계의 얽힘으로서 현전하는 자아를 밝히는 작업으로서의 초월철학.

 

보이지 않는 것의 현상학

 심층 현상학depth phenomenology과 표층 현상학 surface phenomenology의 구분. 우리는 특정한 대상과의 특정한 지향 작용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지만, 주체성의 지반 아래 어떤 수동성의 차원, 혹은 심층-차원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해서도 탐구하고자 할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의식의 구조에 관한 후설의 탐구, 하이데거의 ‘나타나지 않은 것의 현상학’의 요청, 앙리의 내재적 드러남, 혹은 ‘보이지 않는 것의 현상학’ 등이 그것을 잘 보여준다. 

 

제6장 메를로-퐁티의 지각의 현상학 서문 (04.22.)

 메를로-퐁티의 《지각의 현상학》 서문은 ‘현상학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대답을 내놓고자 한다. 1부 내용의 주요 쟁점들이 다루어진다.

 

제안1) 본질주의의 한 형태. 개별 대상에 대한 사실적 설명보다 의식의 흐름, 체화, 지각 등의 불변적이고 근본적인 구조에 대한 학.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현사실성에 대한 학이기도.

제안2) 초월철학의 한 형태. 자연적 태도에 괄호 치기.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즉각적이고 직접적인 세계와의 접촉을 실질적으로 이해하기.

제안3) 엄밀학으로서의 철학,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우리의 생활세계와 선과학적 경험에 관한 정의 시도.

제안4) 우리의 경험을 그 자체로 기술하기.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지향적 구조의 발생, 역사성을 분석하기.

 

 현상학은 자연주의적 독단에 맞서, 그것에 선행하는 근원적인 세계와의 관계에 집중하고자 했다. “우리는 우리의 과학적 지식을 포함한 세계에 대한 지식이 신체적으로 고정된 1인칭 관점에서 발생하며, 이러한 경험적 차원이 없다면 과학은 무의미할 것이라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101면) 

 현상학은 1인칭 관점을 강조하는데, 이것을 관념론적인 세계에 대한 주체의 우위성, 혹은 순수한 내면성 따위에 대한 옹호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하이데거의 구절을 사용하자면 우리는 ‘세계-내-존재’를, ... 끊임없이 그 안에 자리 잡은 의미의 맥락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세계를 다루고 있다.” (102면) 이러한 이유에서 현상학에서는 타자, 그리고 상호주관성이 문제가 된다. “주체는 자기-이해나 자기의 세계 이해에 있어 독점적이지 않다.” (103면) 세계, 주체성, 상호주관성을 그 고유한 연결 가운데에서 사유하기.

 때로 우리와 세계의 관계는 너무나 명확해 보이지만, 현상학의 탐구 과제는 바로 이 “무시된 명백함의 영역”에 있다. 그것을 탐구하기 위해서는 세계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둘 필요가 있다. 

 주체는 지향적이다. 주체는 자기-초월 그 자체이며, 자신과는 다른 어떤 것을 향한다. 그러나 주체의 작용 이전에 주어지는 전-이론적, 비-이론적 관계가 있을 수 있다. 

 “메를로-퐁티에 의하면, 이 근원적이고 기본적인 세계-관계는 절대 설명되거나 분석될 수 없다. 이 관계에 주의를 환기하고 우리가 그 관계의 환원 불가능성을 존중하게 만드는 것이 현상학이 할 수 있는 일의 전부다.” 이렇게 해서 현상학은 항상 진행 중인 학문이 된다—끊임없는 지각의 자기 반성으로서의 현상학. “아무리 근본적인 반성이라도, 메를로-퐁티의 표현대로, 최초의, 지속적인, 최종적 상황에 남겨져 있는 아직 반성되지 않은 삶에 의존해 있고 그런 삶에 연결되어 있다.” (106면) 그러나 이것은 환원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주장의 근거가 될 수는 없고, 어떤 고쳐야 할 결함이기보다는 현상학의 본질적인 특징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