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 들뢰즈-칸트 철학을 요약해줄 수 있을 네 가지 시적인 경구에 대하여
칸트 철학을 요약해줄 수 있을 네 가지 시적인 경구에 대하여 + 몇몇 보충 내용
- 번역본을 참조하되, 내가 이미 번역한 바 있는 칸트 강의록에 맞추어서 번역어를 바꾸어 요약했고, 본문에는 없지만 내 이해를 도울 수 있는 내용이 있다면 작성하면서 내용을 끼워 넣었다. 그 경우 대괄호 [] 안에 내용을 집어넣었다.
1. 햄릿_시간은 탈구되었다The time is out of joint/Le temps sort de ses gonds!
칸트 철학에서 시간은 경험 속에서는 실재적이되, 실제로는 실재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경험하는 현상 자체이기보다는 현상들의 선험적 형식이나 조건이고, 따라서 구체적인 경험 속에서 어떤 양태를 띠고 나타날 뿐이기 때문이다. 탈구된 시간은 경첩에서 빠진 문과도 같은 것이어서, 더 이상 어떤 방위cardinal 혹은 운동에 종속되어 있지 않게 된다. 곧, 운동-시간 관계의 뒤집음. 칸트 이전까지는 시간이 운동의 숫자였다면, 이제는 외려 운동이 (시간을 운동 자체의 조건으로 갖게 된다는 의미에서) 시간에 종속하게 된다. [시간은 이제 고정된 점이나 운동에 묶여 있는 원환이 아니라, 용수철을 눌러 놓은 손을 떼어 버리는 것과 같이 직선으로 풀려난다.] 보르헤스가 진정한 미로는 직선 모양이라고 말했듯, 《순수이성비판》과 더불어 시간은 직선의 형식을 갖기 때문에 더 신비로운 어떤 형식이 된다.
시간은 이제 연속성, 영속성, 동시성 등에 의해 정의되지 않는다. 그것은 시간의 본래 속성이 아니라 시간이 구체적인 경험 속에서 취하게 되는 양태이자 관계들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공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인데, 우리는 순수 형식, 경험의 가능 조건으로서의 공간을 공존에 의거해 정의할 수 없다. 운동하고 변화하는 모든 것이 시공간 안에 있지만, 시공간 자체는 변화하지도 운동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그 자신이 어떤 불변의 형식이자, 변화와 운동의 불변의 형식이기도 하다. 시간의 이 같은 자율적 형식은 시간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요구한다.
2. 랭보_나는 타자이다JE est un autre.
랭보의 이 경구는, 칸트 철학에서 ‘나’가 파악되는 두 가지 방식에 관계한다. 칸트는 한편으로는 “시간 속에서 변화를 체험하는 수동적 또는 수용적인 자아Moi”를 정의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매 순간마다 현재, 과거, 미래를 분배하면서 끊임없이 시간의 종합을 이루는 행위, 또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것의 종합을 이루는 행위”로서 나Je를 정의한다. 이 둘은 시간의 선에 의해 분리되어 있으면서도, 시간의 선에 의해 서로 결부된다. 곧, 시간의 선 (혹은 실)에 의해 ‘나’의 질료적이고 수동적인 측면과 형식적이고 적극적인 측면이 나누어지는 동시에 하나로 묶여 있다. “이렇게 볼 때 나의 실존은 결코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어떤 존재의 실존으로 규정될 수 없다.”
데카르트는 ‘나는 사유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말하면서 우리의 자발적인 작용이 우리의 실존을 규정한다고 말한다. [곧, ‘나는 사유한다’는 규정은 규정되어야 할 것으로서의 ‘나’를, ‘사유하는 어떤 것’으로 규정한다 (규정 – 규정되어야 할 것 – 규정된 것).] 그러나 데카르트는 도대체 어떤 형식 아래에서 우리가 사유하는 어떤 것으로서 있게 되는지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실존 [규정된 것]은 오직 시간의 형식 아래에서만 규정될 수 있고, 그러한 이유에서 수동적이고 수용적인 방식으로만 규정될 수 있다. 따라서 나는 유일하고 적극적인 주체로 구성될 수 없다. [곧, 자아는 ‘나는 사유한다’라는 규정을 스스로에게 수동적으로 표상하는 어떤 것으로서만 그 실존이 이야기될 수 있다.] 그러나 이때 이것은, ‘나’가 종합을 이루면서 시간의 형식을 필연적으로 촉발한다면, 자아는 그에 맞물려 시간의 형식 아래 그 내용으로서 촉발된다는 뜻이기도 하므로, ‘나’와 ‘자아’는 시간의 선에 의해 꿰매져 엮여 있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칸트는 랭보보다 더 멀리 나아간다. 랭보가 말하는 “나는 타자이다”라는 말은, 아리스토텔레스적인 형상과 질료의 구별을 떠올리게 한다. “목재가 바이올린이 된들 그 나름대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구리가 나팔로서 깨어났다고 해도 구리에게는 아무런 잘못도 없다!” 여기에서는 형상이 질료를 찍어내는 어떤 주형틀과도 같이 기능한다. 반면, 칸트에게서는 문제가 되는 것이 형상이 아니라 형상과 질료를 나누어 놓는 시간 일반의 형식, 시간의 선이다. 즉 자아는 무한한 변화이지 고정된 형상이 아니다.
시간은 주체 속에서 주체의 활동 (나)과 그 활동이 귀속되는 자아를 구별한다. 자아는 이 시간의 선에 의해 끊임없이 변주modulation된다. 그리고 시간이 어디까지나 주체가 자기 자신을 촉발하는 방식인 한에서, 시간은 (공간이 외성extériorité로 정의된 것과 반대로) 내성intériorité, 내감sens intime의 형식으로 정의된다. 이 내성의 형식 (시간)은 끝이 없으므로, 영원히 주체를 적극적인 ‘나’와 수동적인 자아로 쪼갠다. “이리하여 시간을 구성하는 것은 곧 현기증이자 흔들림이다.”
3. 카프카_선이 무엇인지는 법칙이 말해준다 Le Bien, c’est ce que dit la Loi...
카프카와 더불어 탁월하게 표현된, 선을 지정하는 법의 관념은 철학의 역사에서 낯선 것이다. 플라톤은 우리가 선이 무엇인가를 알고 그것에 순응할 줄 안다면 법은 그저 이차적인 수단에 머물 것이라고 생각했다. 법은 선의 모조품에 지나지 않고, 몇몇 제약 아래에서 선에 의해 도출되는 것이다.
그러나 칸트가 파악하는 법은 최고의 요구로서의 법이다. (1.에서 시간과 운동의 관계가 뒤집혔던 것과 같이) 선은 법칙에 의존하는 것이고,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선은 주관적 법칙의 주위를 맴돈다.
그런데 여기에서 법칙이 ‘주관적’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법칙은 그 자신 외에 아무런 내용도 가질 수 없다. 왜냐하면 법칙이 내용을 갖는 순간 법칙이 선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법칙이 [어떤 내용으로서의] 선에 복무하게 되기 때문이다. 법칙은 순수 형식으로서, 감성적이든 예지적이든 내용을 가져서는 안 된다. 도덕적인 것은 형식적 측면에서 보편적인 것으로 인정될 만한 것이어야 한다. 곧, 도덕적이기 위해 의지가 가져야만 하는 형식으로서의 법칙.
《실천이성비판》에서 텅 빈 법칙의 형식은 《순수이성비판》에서 텅 빈 시간의 형식에 대응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것을’ 하라고 말하지 않으면서 단지 ‘너는 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법칙 안에는 이론적 인식의 대상이 없고 순수하게 실천적인 규정만이 있으므로, 카프카의 단편 <유형지에서>에서 드러나듯 우리는 행위를 통해서만 법칙과 만날 수 있다. [곧, 법칙 자체로는 아무런 구체적인 내용을 가지지 않으므로, 우리가 구체적인 내용을 가지는 행위를 한 뒤에야 우리가 그 행위의 내용을 법칙과 비교해 볼 수 있다.] 이때 법칙의 실행은 어떤 판결과 구별될 수 없고, “우리는 오직 우리의 심성과 육신에 배어든 법칙의 흔적을 통해서만 법칙을 알 수 있다.” “또한 우리는 필연적으로 죄를 범한다. 죄는 시간의 실에 비견되는 도덕적 실과 같다.”
4. 랭보_모든 감각의 착란 Un dérèglement de tous les sens
랭보의 이 표현은 《판단력비판》에서 등장하는, 능력들의 규제되지 않은 활동과 관련된다. 앞의 두 비판서에서 능력들은 언제나 어떤 규정된 일치 속에서 활동했다. 《순수이성비판》에서는 지성이, 《실천이성비판》에서는 이성이 지배적인 역할을 맡으며 다른 능력들을 지도한다. 그러나 말년에 칸트는 능력들의 규제된 일치가 가능하다면, 자유롭고 규제되지 않은 일치가 또한 가능해야 한다는 문제에 직면한다. 여기에서 능력들은 고유한 용도에서 벗어나고 한계에 부딪히면서도 모종의 조화를 이룬다. “이처럼 《판단력비판》은 낭만주의의 토대로서의 면모를 지니고 있다.”
《판단력비판》의 주제는 아름다움과 숭고함에 관한 미학이다. 이것은 《순수이성비판》의 로고스적인 탐구와는 달리 모든 논리를 넘어서 있는 파토스의 원리에 대한 학이다.1) 주체는 여전히 시간의 선에 의해 자아와 ‘나’로 분리되어 있지만, “이것은 시간의 원천들로서 기묘한 결합들, 즉 ‘가능한 직관들의 임의적 형식들’을 형성하기 위해 자아와 ‘나’가 자유롭게 발전하도록 놓아두는 파토스이다.”
“《판단력비판》에서의 문제는, 아름다움을 정의하게 되는 어떤 현상이 어떻게 시간이라는 내감에 자율적 [‘나’]이고 보조적인 [자아] 차원을, 상상력에 자유로운 반성의 힘을, 지성에 무한한 개념적 힘을 주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규칙이 없는 가운데, 자아와 ‘나’의 자발적 일치가 어떻게 가능한가를 증언한다.
여기에서 숭고에 대한 분석은 가장 멀리 나아가는데, 그것은 능력들 간의 싸움을 통해 능력들을 활동하게 만드는 작용이기 때문이다. 이성은 상상력을 부추겨 한계에 부딪히게 하고, 상상력을 지성의 지도 아래에서 해방시키고, 상상력은 그렇게 하여 이성에게 초감성적인 영감을 준다. 상상력과 이성 사이의 싸움, 내감과 지성 사이의 싸움. “이 싸움의 에피소드로는 숭고함의 두 형식, 그리고 천재가 있다.”2) 이렇게 불일치로부터 발생하는 일치가 《판단력비판》의 위대한 발견이고, 칸트가 행한 마지막 전회이다. “모든 능력들의 규제되지 않은 활동, 그것은 미래의 철학을 정의하게 될 것이었다.”
1) 《순수이성비판》과 《판단력비판》에서 로고스와 파토스의 구분. 칸트는 판단력을 보편 아래에 특수를 포섭하는 규정적 판단력과 개별적인 것으로부터 보편적인 것을 이루어 내는 반성적 판단력으로 나눈다. 이때 전자의 작용은 특수한 것들을 그 아래에 정리할 지성의 개념을 이미 전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로고스적이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 특수를 모아낼 수 있는 보편을 합목적적으로 구성할 권리는 어디에도 없다. 합목적성은 마치 있는 것처럼 가정되지만, 로고스적인 규정성은 가지지 못한 것으로 이해되고, 따라서 파토스적이다. 이때 판단력의 파토스적 작용은 이미 그 작용의 방향이 결정되어 있는 규정된 일치가 아니다. 그것은 “능력들 간의 그리고 능력들과 대상 간의 자유롭고 규정되지 않은 우연한 일치”이다.
숭고함의 경우에도 우리는 어떤 파토스적인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는데, 후술되겠지만 숭고에서 역시 능력들의 규정되지 않은 일치가 발견되기 때문이다. 이때 숭고의 규정되지 않은 일치는 수학적 혹은 역학적으로 숭고한 대상으로부터 발생하는 능력들의 불일치로부터 구성되어 나오는 일치로, 미적 판단에서의 일치와는 그 메커니즘이 다소 다르다. 들뢰즈는 이 글에서 숭고함의 파토스가 능력들 간의 어떤 극적인 싸움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숭고를 더 멀리 나아간 파토스라고 이해한다.
들뢰즈는 칸트를 독해하면서, 규정된 로고스적 일치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먼저 규정되지 않은 파토스적 일치가 가능해야 한다고 보았고, 따라서 이러한 종류의 파토스가 로고스의 근거를 세우는 이링라고 보았다. 그리고 이것이 <칸트 미학에서 발생의 이념>이라는 논문의 주제이기도 했다.
2) 천재가 우리에게 주어진 자연과는 또 다른 자연을 창조하면서 미적 이념을 구현해 낸다는 점을 생각할 때, 천재는 본래 표현될 수 없었던 상징들을 표현할 수 있는 직관을 생산하고, 그렇게 현시된 미적 이념에 의해 지성과 상상력을 해방시키는 자로 이해된다. 여기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자연’과 천재가 자연 안에서 구현하고자 하는 ‘미적 이념’ 사이의 불일치를 어떤 싸움으로 보면 적절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