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작가별 분류)/Gilles Deleuze

질 들뢰즈, 《칸트의 비판철학》 서론 <초월적 방법>

CucuClock 2023. 10. 24.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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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 들뢰즈, 《칸트의 비판철학》 서론 <초월적 방법> 요약

2023.10.11. 이동구

 

  1. 칸트에서의 이성

칸트는 철학을, ‘인간 이성의 본질적 목적들에 대한 모든 인식의 관계에 관한 학문,’ ‘인간 이성의 최고 목적들에 대해 이성적 존재가 느끼는 사랑’으로 정의한다. 이성의 목적은, 기계적인 자연의 질서와는 대비되는 문화의 체계를 형성한다. 이렇게 이성의 목적을 규정하는 칸트의 기획은, 경험론과 독단적 이성론 모두와 대결하는 것이었다. 

경험론에 따르자면, 이성은 목적들에 대한 능력이 아니다. 목적들이란 근원적 감수성, 목적들을 정립할 수 있는 [행위자의 자연적] ‘본성’에 의거한 것일 뿐으로, 이성의 독창성이란 인간과 동물이 공유하는, 목적을 실현시키는 특정한 방법의 차이에 따라 정의된다. 즉, 동물과는 일단 구별되되, 어디까지나 자연적으로 확립된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수단을 조정하는 책략 혹은 계산으로서의 이성. 

그러나 칸트는 이것에 반대하여서, 자연의 목적과 구별되는 문화의 목적이 있다고 쓴다. 곧, 이성에 고유한 목적들이 있으며, 그러한 목적들은 절대적으로 최종적이고 무조건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보이기 위해 칸트가 끌어들이는 논변은 다음의 세 가지이다.

 

1) 가치로부터의 논변: 이성이 자연의 목적만을 위해 사용된다면, 이성은 자연적 유용성에만 복무하는 것이 된다. 그런데 그렇다면 어떻게 이성이 단순한 동물성보다 우월한 가치를 가지겠는가? 그러나 이성은 보다 높은 유용성에 관련해서 존재한다. 

 

2) 귀류법을 통한 논변: 자연이 자신의 목적을 이성을 부여받은 존재 안에서 실현시키기를 원했다면, 왜 우리의 본능이 아니라 이성을 통해 그것을 실현시키고자 했겠는가? 

 

3) 상춤됨으로부터의 논변: 이성이 단지 [자연적 목적 아래에서] 어떤 수단과 책략으로서만 기능한다면, 어떻게 인간 안에 동물적인 것과 이성적인 것이라는 상반되는 두 종류의 목적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다음으로, 칸트의 견해는 이성적 존재가 목적을 추구하되, 이성에 대해 외재적인 상위의 것 (의지의 규칙)들을, 예컨대 존재, 선, 가치 등을 목적으로 갖는다고 보는 이성론에도 반대한다. 이성론을 이렇게 이해할 때, 그것은 경험론과 그다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양자 모두는 이성 밖의 어떤 목적이 있고, 우리 밖의 목적을 우리가 표상할 때, 우리의 의지가 그 표상의 ‘대상’과 관련된 만족을 통해서만 규정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경험론과 이성론은 따라서, 그러한 목적의 표상이 감각적이냐 이성적이냐 하는 점에서만 다를 뿐이다. 

따라서, 이성 자신의 목적들이 있고, “이성은 목적들을 정립함에 있어서 이성 자체 외에는 아무것도 정립하지 않는다”는 칸트의 견해는 이성론의 관점에 대한 중요한 비판이 된다. (pp.17-18) [곧, 이성은 자기 밖의 어떤 목적을 갖기보다, 그 자신이 그 자신뿐 아니라 자신의 목적 또한 정립한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이성 고유의 관심들이 존재하며 (이성이 자신의 목적을 스스로 정립하며), 이성은 그 고유한 관심들의 유일한 재판관이라고 (자기 자신을 또한 정립한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 곧, 스스로 목적을 수립하고 그 목적이 알맞게 세워진 목적인가에 대해 스스로를 재판하는 재판관으로서의 이성. 이성에 대한 이 같은 내재적 비판이 초월적 방법의 본질적 원리이다.

이 방법은 다음의 두 가지를 규정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1) 이성의 관심들과 목적들의 진정한 본성, 2) 이 관심들을 실현할 방법들. 이 각각의 목표가 능력의 첫 번째 의미, 그리고 두 번째 의미에 각각 대응한다.

 

2. 능력이라는 말의 첫 번째 의미: 목적들의 체계

[경험론과 이성론에서, 표상은 이성 밖의 목적에만 관계하는 것으로 여겨졌으나,] 이제 모든 표상은 대상과 주체에 관계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이 관계의 유혀에 따라 우리는 표상의 종류를 또한 구분해 볼 수 있겠다.

 

1) 표상이 대상과 일치하거나 대상과 부합하는 경우. 이것이 인식 능력을 정의한다.

 

2) 표상이 대상과 인과 관계를 맺는 경우. 이것이 욕구 능력을 정의한다. (실현 불가능한 욕구에 대해서도 이러한 정의는 유효한데, 혹여 우리의 욕구능력으로 정의된 인과가 또 다른 인과—예컨대 자연적 인과—와 충돌하더라도 그 결과를 얻고자 하는 우리의 노력은 그만두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3) 표상이 주체에게 효과를 미치는 경우. 이것이 즐거움과 고통의 느낌을 정의한다. 이러한 표상은 주체의 활력을 증강시키거나 약화시키면서 주체를 촉발한다. 

 

그러나 내재적 비판의 문제는, 어떤 표상이 어떤 작용을 사실상de fait 낳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권리상 어떤 능력들이 상위 형식을 이루는가 하는 문제이다. “능력이 그 자신 속에서 자기 자신을 실현시킬 방법을 찾을 때 우리는 그 능력이 상위 형식을 갖는다고 말한다.” (p.20) 상위 형식의 관점에서 능력들은 자율적이며, 각각의 비판은 ‘상위 인식 능력(KrV)’, ‘상위 욕구 능력(KpV)’, 그리고 ‘즐거움과 고통의 상위 형식(KU)’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곧, 능력의 자율성이란 있는가? 그리고 능력이 그 자신 속에서 자기 자신을 실현할 수 있는가?]

 

2-1. 상위 인식 능력

인식은 표상을 갖는 것만으로는 성립하지 않는다. 인식은 표상의 대상 가운데서, 표상 속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어떤 것을 긍정함으로써 성립한다. 곧, 인식을 위해서는 그 표상 밖으로 나가야 한다. 이 종합은 두 가지 방식으로 일어날 수 있다.

 

1) 경험에 의존할 경우 종합은 후험적인 종합이다. 가령, ‘이 직선은 흰색이다.’ 이때 모든 직선이 흰색도 아니고, 이 직선이 흰색인 것이 필연적이지도 않다.

 

2) 경험과는 상관없이 보편적/필연적으로 이루어지는 종합은 선험적이다. 예컨대, ‘변화하는 모든 것은 원인을 갖는다.’ 선험성이란 경험으로부터 도출되지 않는 보편성과 필연성이다.. “원인은 귀납의 소산이 아니라 경험 가운데서 발생하는 어떤 것을 인식할 수 있도록 해주는 선험적 개념이다.” (p.22)

종합이 경험적일 때, 인식능력은 하위 형식이다. 그것은 스스로 자기를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 가운데에서 자신의 법칙을 찾기 때문이다. 한편, 상위 인식 능력을 정의하는 것은 선험적 종합이다. 상위 인식 능력은 대상들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상위 인식 능력의 법칙은 대상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러한 선험적 법칙이 표상 속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속성을 표상에 부여한다. 즉, 여기에서는 표상이 인식 능력의 지도를 따르지, 인식 능력이 표상의 지도를 따르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상위 인식 능력에 의해 정의되는 이성의 한 가지 관심은 사변적 관심이다. “이성은 본래 사변적 관심을 체험한다. 그리고 이성은 상위 형식 아래서 인식 능력에 필연적으로 종속되는 대상들에 대해 사변적 관심을 체험한다.” (p.23) 한 가지 주의할 점은, 이때의 대상은 물자체가 아니라 우리에게 나타난 것인 한에서 표상된 ‘현상’이라는 것이다. 사변적 관심은 현상에 대해서만 타당하다.

 

2-2. 상위 욕구 능력

욕구능력은 의지를 규정하는 표상을 전제할 수 있다. 이 경우 욕구능력에서 이 표상이 현존하는지 그렇지 않은지와는 상관없이, 표상은 그것과 연관된 즐거움의 매개를 통해서 의지를 규정할 것이다. 이 경우 의지는 경험적이고 후험적으로, 정념을 통해pathologique 구선된다. 이 경우 욕구능력은 하위 욕구능력이다.

상위 욕구능력은 어떤 ‘대상’의 표상에 의해서가 아니라, 순수 형식의 표상에 의한 것이어야 한다. 의지를 규정할 수 있는 모든 다른 근거를 내버릴 때, 남는 것은 형식적인 법칙뿐이다. 이 욕구능력에 상응하는 실천적 종합은 선험적이다. 욕구능력이 자기 밖 (내용, 대상)에서가 아니라, 자기 안에서 자신의 법칙을 찾는다는 점에서 이 욕구능력은 상위 욕구능력이다. 

이리하여 즐거움이나 고통과는 상관없이 저 혼자 의지를 규정하는 능력에 의해 또 다른 이성의 관심이 정의되는데, 이것이 실천적 관심이다. (이 관심이 무엇을 대상으로 하고, 이 능력이 무엇에 대해 입법하는가는 2장에서 다루어질 것이다.)

(즐거움과 고통의 상위 형식은, 그 자체로 다른 두 비판을 전제하므로 여기에서는 잠정적으로 다루어지지 않는다. 이 내용은 3장에서 다루어질 것이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능력의 첫 번째 의미에 비추어 비판의 원리를 설명할 수 있게 된다. ‘본성상 서로 다른 이성의 관심들은 어떤 것이고, 이들은 어떤 체계를 이루는가? 곧, “관심들의 체계적 다수성과 위계성의 이념, 목적의 체계의 원리.” (p.27)

 

3. 능력이라는 말의 두 번째 의미: 표상들의 고유한 원천

두 번째 의미의 능력은 표상들의 고유한 원천을 가리킨다. 따라서 우리는 표상들의 종류의 수만큼의 능력들을 구별할 수 있다. 

 

1) 직관 (경험의 대상과 직접 관계, 감성에 원천을 두는 특정한 표상) 

2) 개념 (다른 표상들의 매개를 통해 경험 대상과 간접적으로 관계하고, 지성에 원천을 두는표상)

3) 이념 (그 자체 가능한 경험을 넘어서고, 이성에 원천을 두는 표상)

 

그러나 ‘표상’에 대한 지금까지의 이해는 너무 거친 것인데, 더 정확한 이해를 위해서는 ‘나타난 것ce qui se présente’과 ‘표상représentation’을 구분해야 한다. 

 

우리에게 먼저 주어지는 것은 나타나는 것으로서의 대상이지만, 아직 그것은 대상이라고 할 수 없다.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은 대상 자체가 아니라, 직관 가운데 포착되는 경험적 다양으로서의 현상이기 때문이다.

직관은 시공이라는 감성의 순수 형식을 경유하여서, 현상적 경험적 다양으로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이되, 표상이 아니다. 표상은 나타난 것présentation을 다시re- 거머쥐는 활동으로서, 나타난 것의 종합 자체이다. 그러므로 ‘표상’은 어떤 수동성, 다양성과는 구별되는 활동성과 통일성을 함축한다. 

이리하여 수용 능력으로서의 감성과 표상의 원천으로서의 활동적 능력들이 구분된다. “종합은 활동에 있어서는 상상력에, 통일에 있어서는 지성에, 전체성에 있어서는 이성에 의존한다.” 그리고 이들 각각이 주어진 것에 대한 특정한 유형의 표상을 낳는다. 

 

4. 능력의 두 의미 사이의 관계

능력의 첫 번째 의미에 따라, 상위 형식 아래에서 능력은 자율적이며, 자기에게 종속되는 대상에 대해 입법적이다. 그리고 각각의 상위 형식을 취하는 능력에 대해 특유한 이성의 관심이 대응한다. 따라서 비판의 첫 번째 질문: “상위 형식들은 무엇인가, 이성의 관심들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 관심들은 무엇을 대상으로 하는가?” 그러나 아직, 이성 스스로가 자기의 고유한 관심을 실현시킬 수 있음을 보증해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리하여 능력의 두 번째 의미에 따라, 곧바로 두 번째 질문이 뒤따른다: “어떻게 이성은 관심을 실현하는가? 무엇이 대상들의 종속을 확정하는가, 어떻게 대상들은 종속되는가?” 이 수준에서 칸트는 각각의 관심을 실현시키는 것이 어떤 능력인지, 그러한 관심 아래에서 다른 능력들이 어떻게 규정된 임무를 갖게 되는지에 대해서 말한다. 

요컨대, 능력의 두 가지 의미 사이의 관계는 이렇다. “첫 번째 의미의 능력들 (인식능력, 욕구능력, 즐거움과 고통의 느낌)은 두 번째 의미의 능력들 (상상력, 지성, 이성)이 형성하는 이런저런 관계와 대응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