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작가별 분류)/Alain Badiou

바디우 메모 1_Décision de quoi?

CucuClock 2023. 10. 8. 11:59
728x90

2023.10.08. 메모

알랭 바디우의 철학적 상황들

바디우와 지젝-현재의 철학을 말하다 (대담 2004) 독서 중

 

철학이 뭐 하는 짓인지, 내가 이 안에서 뭘 어떻게 하고 싶은지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앞으로 개인적으로 공부하는 것/번역하는 글/쓰는 글이 있다면 이 주제 주변을 맴돌도록 할 것이다. 바디우나 지젝의 이 대담을 일단 중요하게 참조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

 

철학의 역할은 무엇이고, 철학자가 문제에 개입해야 하는 지점은 어디인가? 철학자는 텔레비전이나 신문의 지면에 등장해서 모든 것에 대해 말하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철학자는 문제를 구성하고, 무엇이 문제인지를 스스로 결정하는 사람이다. 그는 새로운 문제 혹은 새로이 문제를 구성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 사태에 개입한다. 그렇다면 정말로 철학적인, 철학을 위한 상황이란 어떤 상황일까? 바디우가 제시하는 세 가지 철학적 상황을 보자: 

 

  1. 소크라테스와 칼리클레스의 다툼: 선택이 분명해지는 순간

플라톤은 《고르기아스》에서 소크라테스와 칼리클레스의 이질적인 만남을 소개한다. 칼리클레스는 행복이란 교활함과 폭력을 통해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는 압제자의 힘이라고 말한다. 한편 소크라테스에게 행복한 사람은 진실한 사람이다. 이 둘 사이에는 소통이 가능한 척도가 없다. 이 두 사람의 사유는 정사각형의 대각선의 길이나 변의 길이와 같이 공통된 기반 위에서 측정되거나 다루어질 수 없다. 둘 사이의 실재적 관계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이 둘의 만남은 토론이기보다는 대결이다. 이 대결의 끝은 설득이나 설복이 아니라 승리와 패배로만 기록될 수 있을 따름이다. “결국 이것이 소크라테스가 이 대화에서 사용하는 방법들이 칼리클레스의 방법들과 비교해서 더 정당하다고 볼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한다.” (p.18) 철학의 첫 번째 역할이 여기에 있다. 우리가 처해 있는 선택의 상황을 분명히 드러내기, 선택에 대해 명료하게 설명하기. 실존의 선택 혹은 사유의 선택. 

 

2. 아르키메데스의 죽음: 권력과 진리들 사이의 거리를 가늠하기

아르키메데스는 시칠리아 출신의 그리스인이었고, 로마가 시칠리아를 침략했을 때 이런저런 전쟁 기계를 발명하면서 저항했다. 그러나 결국 전쟁은 로마의 승리로 끝났고, 로마의 장군 마르켈루스는 병사를 보내 아르키메데스에게 자기가 그를 만나고 싶어 한다고 전하게 한다. 아르키메데스는 이때 그가 평소 하던 것처럼 바닷가에 앉아 바닥에 기하학적 도형을 그리면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병사는 ‘장군이 당신을 만나고 싶어 한다’며 아르키메데스를 재촉했지만, 아르키메데스는 대꾸 없이 생각에 잠겨 있었다. 재촉이 계속되자 아르키메데스는 “이 증명만 좀 마칩시다!” 하고 외치지만, 병사에게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마르켈루스가 당신을 보고 싶어 한다니까!” 분노를 참지 못한 병사는 칼을 빼들어 아르키메데스를 내리쳤고, 바닥의 도형은 쓰러진 아르키메데스의 몸 때문에 지워지고 말았다. 

이 사례는 “국가의 권리와 창조적 사유, 특별히 수학 속에서 구체화되는 순수하게 존재론저긴 사유 사이에 어떤 공통된 척도도, 진정한 토론도 존재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철학적이다. (p.21) 창조적 사유는 오로지 자신의 고유한 시간성, 내재적 규칙들만을 따른다. 권력과 창조적 사유 사이에는 어떤 공통적 기준도, 시간성도 없다. (2차대전이 끝날 때쯤 오스트리아 빈에서 안톤 베베른이 오인사격으로 죽음을 맞이한 것도 비슷하다.) 여기에 두 번째 철학의 역할이 있다: 진리와 권력 사이의 이 거리를 가늠하고 밝혀내기. 측정할 수 없는 거리를 사유하고 고려하기, 혹은 그 거리를 측정할 방법을 발명하기. 

 

3. 미조구치 겐지의 <치카마츠 이야기>: 예외, 사건, 단절의 가치를 드러내기

한 젊은 여자가 사랑하지도 욕망하지도 않는 공장주인 남자와 결혼한다. 그녀는 이내 남편의 고용인으로 들어온 젊은이와 사랑에 빠지는데, 고전 시대 일본에서 간통을 저지른 이들은 십자가형에 처해져야 했으므로 시골로 도망친다. 남편은 간통을 저지른 이들을 고발할 의무가 있지만, 아내가 친척을 만나러 지방으로 내려간 척 꾸미는 등 시간을 벌려고 애쓴다. 그러나 시골로 도망친 이 한 쌍은 이내 발각되고 고문에 처해진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이 둘은 노새 위에 묶인 채로 죽음을 맞으러 가지만, 둘의 표정은 슬프기보다 차라리 희미한 웃음을 띠며 황홀함에 젖은 듯하다. 이야기는 죽음으로 끝나지만, 이들은 결코 죽음을 욕망하지 않았다. 이들의 죽음은 사랑과 죽음의 결합 같은 주제와는 무관하다. 들뢰즈가 예술을 죽음에 대한 저항으로 이야기한 것과 같이, 이들의 사랑도 죽음에 대한 저항이다. 

이 상황은 왜 철학적일까? 그것은 여기에서 우리가 “다시 한번 통약 불가능한 어떤 것과, 다시 말해 관계라고 할 수 없는 관계와 마주하게 되기 때문이다.” (p.24) 이들의 사랑에는 일상적 규칙과 통약가능한 부분이 단 하나도 없다. 철학은 이 같은 예외에 대해 사유하고, 사건에 대해 사유해야 한다. 삶의 변형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이렇게 하여, 창조로서의 철학적 개념은 선택 (결정), 거리 (틈새), 예외 (사건)의 문제를 한데 결합시킨다. 그리고 이들 모두는 어떤 이질적인 항목들 사이의 관계와 연결되어 있다 (‘관계’라고 표현했지만, 이들은 사실 관계의 부정이고 단절이다.) 우리는 이미 확립된 자연적, 사회적 유대 관계 속에서 어떤 단절을 본다. 우리는 칼리클레스와 소크라테스 가운데 한 편에 붙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일단 아르키메데스 편에 서게 될 경우, 우리는 더 이상 마르켈루스의 편에 설 수 없다. 또 만약 두 연인의 여행에 마지막까지 함께한다면, 우리는 결코 다시는 부부 관계와 관련된 법의 편에 설 수 없다.” (p.27) 철학은 이렇게 하여 관계라고 부를 수 없는 관계들에만 관심을 갖는 것이다. 

 

이제 동시대의 몇 가지 예들을 살펴보자. 다음의 항목에서 ‘부정적’ 혹은 ‘긍정적’이라는 말은 그러한 상황이 좋거나 나쁘다는 뜻이 아니라, 그 상황이 어떤 예외 상황, 통약불가능성을 드러내는 데 실패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부정적’이거나 ‘긍정적’인 것으로 읽어야 한다.

 

4. 부정적인 예시로서의 의회주의: 지독한 통약가능성

철학의 역할이 등장하지 않는 부정적 예시는 전형적 의회주의의 일반적 상황이다. 이것은 우리가 선거나 법률에 대한 찬반에 대해 관심을 갖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이 결코 아니고, 단지 여기에 철학자가 철학적으로 개입할 지점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의회에서 다수 세력과 소수 세력은 의회주의의 일상적 기능 속에서 통약가능한 상태에 있다. 여기에 관계 아닌 관계, 역설적인 관계나 단절은 없다. ‘민주적 변화’란 어떤 공통된 척도 속에서 한 세력이 다른 세력을 대체하는 것으로 만들어지지, 어떤 예외적인 상황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선거의 결과는 주저하는 사람들의 결정으로 갈린다. 이들의 결정은 “결단력 있는 사람들에 의한 결정이 아니라 결단을 내리지 못한 사람들의 결정, 또는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했거나 우연한 상황 때문에...” (p.30) 결정을 내리게 될 사람들의 결정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규칙의 실현만을 보지, 어떤 예외나 단절을 보지 못한다. 선거의 문제는 소통이 가능한 ‘의견opinion’의 문제이지, 통약 불가능하게 창조적으로 도래하는 진리의 문제와는 다르다. 이들은 문제의 창조를 위한 기호를 구성하지 못한다. 

 

5. 긍정적인 예시로서의 이라크 전쟁: 지독한 통약불가능성

이라크 전쟁의 사례에서는 의회주의와 선거의 경우와 달리, “모든 기준들이 한데 결합되어 있다.” 첫째로, 여기에는 통약불가능한 어떤 것이 있다. 미국과 이라크 사이에는 어떤 공통의 척도도 없다. 공통된 척도가 없으니 “대량살상무기의 존재 여부가 모든 개입을 정당화할 수 있는 중요성을 갖게 된다. 대량살상무기에 대한 미국과 영국의 정치적 선전은 사람들로 하여금 어떤 척도가 있다고 믿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상 대량살상무기는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공통된 척도는 애초에 없었던 셈이다. 둘째로 우리는 선택의 절대적 필요성에 직면한다. 우리는 전쟁에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것밖에 다른 입장을 취할 수는 없어 보인다. 셋째로 우리는 권력으로부터 거리를 유지할 수 있게 된다. “대중의 전쟁 반대 시위 운동들은 미국의 헤게모니적 권력과 관련해서 중요한 주체적 틈새를 창조해 낸다.” (p.32) 마지막으로, 이러한 시위 운동들이 이루는 새로운 상황에 의해 새로운 이해와 행동의 가능성이 산출된다. 

 

‘관계 아닌 관계들이 있는가? 통약불가능한 요소들이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긍정적일 경우, 우리는 의견에 대한 단순한 고려로부터 철학적 상황으로 넘어간다. 

 

6. 철학과 정치

철학적 참여는, 철학과 정치가 서로 얼마간 영향을 주고받기는 하지만, 어떤 단독성singularity를 갖는다. “정치는 집단적 상황들의 변형을 목표로 하는 반면, 철학은 모든 사람들에게 새로운 문제들을 제시하려고 시도한다.” 철학적 문제는 정치적 판단과는 전혀 다른 판단 형식을 이룬다. 이것은 때로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사안이, 철학적으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예외에 주목하고, 권력으로부터 거리를 두면서 통약불가능한 것에 몰두하는 철학적 참여는 이러한 이유에서 종종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되곤 한다. “나는 진정한 철학적 참여는 여러 상황들 속에서 이질성foreignness을 창조한다는 바로 이 지적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p.34.) 그렇지 않고서는 철학적 참여가 아니라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시민적 참여가 될 뿐이겠다. 

철학자가 말을 거는 이들은 수사학에 의해 설득되는 이들이 아니라, 침묵의 확신을 통해 설득되는 이들이다. 이것이 철학적 참여이다. “새로운 사유를 통해 동료들, 종종 침묵한 채로 있는 동료들을 만드는 이 인물을 모든 인류에게 예외 없이 전해질 수 있는 보편적인 명제들이 존재한다는 확신에 전적으로 근거하고 있다.” 

 

여기에서 바디우가 말하는 ‘보편성’이란 무엇일까? 선택을 명료하게 드러내기, 권력으로부터의 거리 두기, 예외에 주목하기라는 철학적 상황으로부터, 철학적 참여가 어떤 보편적인 명제가 존재한다는 확신에 근거한다는 말이 따라나오지는 않는 것 같은데, 뒤에 이어지는 바디우의 보편성에 대한 설명을 찬찬히 읽어봐야 할 것 같다. 학교 오가는 길에 몇 차례 시도했다가 너무 어려워서 금방 포기하고 접었는데, 진득허니 곱씹어볼 필요가 있을 듯.

별개로 오늘 밤에 틀어놓고 잘 영상은 이라크 전쟁 다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