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작가별 분류)/Henri Bergson

앙리 베르그송,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2차시

CucuClock 2023. 9. 26. 15:02
728x90

앙리 베르그송, 《시론》 2차시 (2023.09.22.)

이동구 (철학과, 2022-19928)

분량: 《시론》 머리말과 1장 (pp.15-95)

 

머리말

비연장적인 것을 연장적인 것으로, 질을 양으로 부당하게 번역함으로써, 제기된 문제의 바로 한가운데에 모순을 자리잡게 했을 때, 제시된 해답들 속에서 그 모순을 다시 발견하는 것이 놀라운 일일까?... 우리가 확립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결정론자들과 그 반대자들 사이의 모든 논쟁이 이미 그 전제 속에, 지속과 연장성, 계기와 동시성, 질과 양 사이의 혼동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한 혼동이 일단 걷히기만 하면, 아마도 자유에 반대하여 제기되는 반론들과 자유에 대해 사람들이 내리는 정의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자유의 문제 자체가 사라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p.16)

 

제1장 심리상태들의 강도에 관하여

  1. 강도의 성격을 띤 것과 외연적인 것 (pp.17-24)

 순수한 내적 상태(들)을 양적으로 비교하는 것은 가능할까? 우리는 어떤 수나 공간이 다른 수나 공간보다 크거나 작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어떤 감정 상태가 ‘더’ 혹은 ‘덜’ 강하다고 말한다. 이때 우리는 더 큰 수가 더 작은 수를 포함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더 강한 감정이 더 약한 감정을 포함하며, 우리가 더 강한 감정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약한 감정을 거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베르그송이 보기에 여기에는 “매우 불분명한 점이 있으며,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중대한 문제가 있다.” (p.18) (심리상태들의) 강도强度는 크기와 동일시될 수 없고, 서로 다른 강도들 사이에는 포함하고 포함되는 문제가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증가하고 감소하며, 포함하고 포함되는 양은 언제나 어떤 분할 가능성을 전제한다. 우리가 심리상태들의 증감과 포함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알게모르게 분할될 수 없는 강도적인 것을 외연적인extensif (연장적인étendu) 것으로 번역한다. 베르그송이 보기에 심리상태의 양적 크기를 말하는 것이 문제적인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런데, 심리상태들 각각의 강도란, 양화될 수 있는 어떤 다른 요소들에 상응하는 것이 아닐까?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베르그송은 우리에게 주어지는 외적인 원인들의 크기, 그리고 우리 몸속의 분자운동 등과 심리상태들의 관계를 검토한다. 

 먼저, 심리 상태의 강도가 측정 가능한 원인들의 수나 크기로 정의될 수 있다는 주장을 보자. 그 경우 우리는 원인의 성격을 알지 못하는 가운데 무모한 가설을 내세우거나, 심지어는 결과로서의 강도를 원인의 수와 성격에 투사하기까지 (곧, 감각의 판단을 그 결과의 강도에 의해 수정하기까지) 한다. 그에 더해 이 견해는 어떤 외적 원인과도 상관없이 오는 깊은 심리상태들을 설명할 수 없다. 더불어 우리가 우리의 내적 상태에 대해 말하기 위해 항상 원인의 수나 작용을 경유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면도날을 부러뜨리는 것이 철봉을 구부리는 것보다 쉽다고 말할 때, 면도날과 철봉의 성격을 먼저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다음으로 모든 의식 상태가 “뇌수의 분자와 원자들의 일정한 진동에 대응”한다는 운동론의 입장을 살펴보자. 그러나 베르그송이 보기에는 이 입장도 의식 상태가 양적인 어떤 것에 대응한다고 말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한 감각의 강도가 우리 몸속에서 일어나는 일의 크고 작음을 나타내는 것은 가능하지만, 의식에 의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감각이지 그러한 기계적인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p.23) 우리는 오히려 우리에게 느껴지는 감각을 가지고 몸속의 일의 크기를 평가한다.

 이러한 이유에서 ‘우리가 왜 의식의 크기와 증감을 말할 수 있다고 여기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 ‘의식이 실제로 양적인 것이다’라고 답하는 시도는 실패하고 마는 것이다.

 

2. 강도 개념을 통한 감정들의 분석 (pp.25-78)

 2-1. 깊은 감정들

 감각이나 신체적 노력은 운동이나 외부 대상의 지각과 결합하므로 나중의 분석을 위해 넘겨 두고, 베르그송은 먼저 외연적인 것이 개입하지 않는 자기충족적인 영혼의 상태들, “깊은 슬픔과 기쁨, 숙고한 열정, 미적 감동”을 고찰한다. 이런 상태들은 “크고 작은 덩어리의[각주:1] 심리적 상태들을 물들이는 어떤 성질이나 색조로, 또는 원한다면, 기저의 느낌에 스며드는 크고 작은 수의 단순한 상태들로 환원”된다. (p.25) 가령, 막연한 욕망이 갈수록 깊은 열정이 될 때 우리는 그 욕망이 점점 우리 의식의 많은 부분에 침투하여 사태 전체에 대한 관점을 바꾸어 놓는 것을 느낀다. 깊은 감정은 영혼 속에서 차지하는 자리를 넓혀 가면서 수많은 지각, 기억에 침투하여 의식의 전체적인 성격을 바꾸어 놓는다. 그러나 우리의 회고적 지성은 의식에 관한 이러한 동적인 표상보다 윤곽이 분명한 구분을 좋아하기 때문에, 의식을 공간적이고 수적인 어떤 것으로 파악하려는 경향을 띠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우리 의식의 변화는 단선적인 크기의 변화이기보다는 질의 변화이다. 

 

<희망, 기쁨, 슬픔>

 희망의 경우, 우리는 동일하게 미소지으며 나타나는 미래의 가능성에서 기쁨을 느낀다. 그 가운데 어떤 것이 실현될 때 우리는 다른 모든 가능성들을 잃어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소유보다 희망에서, 현실보다 꿈에서 더 많은 매력을 발견한다. 미래의 가능성이 우리에게 주는 이러한 효과에 비추어 기쁨과 슬픔이라는 깊은 감정을 분석해 보자. 

 먼저, 기쁨의 감정이 점차로 우리의 의식 속에서 몸집을 키워 갈 때는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가? 가장 낮은 단계에서 그것은 미래로의 정향이다. 그 뒤 미래로의 정향은 모든 것을 더 적은 노력으로 행할 수 있게 해 준다. 극도의 기쁨에 이르러 우리는 매 순간 새로워지는 존재의 경이로움 같은 것을 느낀다. 물론 이것은 잠정적인 구분일 뿐, 각 단계의 사이에는 무수히 많은 질적 상태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의식은 이 간격 사이에 인위적 구분점을 세우고, 한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 상태가 이동할 때 하나의 동일한 감정이 점점 강해지는 것으로 생각한다.

 슬픔의 감정에 대해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가장 낮은 단계에서 그것은 과거로의 정향과 같은 것이었다가, 미래가 닫힌 것처럼 우리의 감각과 생각을 빈약하게 한다. 극도의 슬픔에 이르러서 우리는 무를 갈망하고, 씁쓸함을 거의 즐기게 되는 상태에서 으깨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기쁨: 미래로의 정향 -> 미래가 우리를 당기는 듯한 느낌 -> 매 순간의 새로움, 존재의 경이로움

슬픔: 과거로의 정향 -> 미래가 닫힌 것 같은 느낌 -> 무를 갈망, 모든 것이 무의미한 상태

 

<미적 감정: 우아함과 아름다움>

 미적 감정 역시 그 각 단계가 질적으로 다른 것이지만, 어떤 양적인 증가로 파악되기 쉬운 것이다. 여기에서는 우아함의 감정과 아름다움의 감정이 분석된다. 우아함의 느낌은 가장 낮은 단계에서 어떤 편안함, 용이함의 지각이다. 용이함이란 다음 동작을 수행하기 쉽게 해 주는 것이므로, 우아함의 감정은 다음 단계에서 어떤 예견 가능성으로 넘어간다.[각주:2] 여기에 음악과 같은 리듬 (율동rythme, 박자mesure)의 요소가 개입한다면 예견 가능성은 더 커진다. 우리는 예술가의 움직임이 우리 자신의 것인 것처럼 느끼며 예술가와 신체적으로 공감하게 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정신적 공감이 어떻게 신체적 공감과 이어지는가를 본다. 우아함의 감정이란 그것이 제공하는 미래에 대한 예측 가능성 속에서, 저항할 수 없는 매력으로 우리로 하여금 정신적, 신체적 노력을 들이게 하는 즐거움의 원천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회고적 지성은 이번에도 이 질적 전진을 어떤 크기의 변화로 해석하기를 좋아한다. “그것은 우리가 단순한 것을 좋아하고, 우리의 언어가 심리적 분석의 미묘함을 번역하기는 곤란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p.33) 이제 아름다움에 대한 분석을 보자. 베르그송은 자연으로부터 오는 아름다움을 분석하기에 앞서 예술 작품으로부터 오는 아름다움을 분석해야 한다고 쓴다. 왜냐하면 자연의 아름다움이 예술에 앞선다고 말하자면 예술이란 이미 있는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방식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며, 아름다움의 본질은 신비에 싸인 채로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우리의 예술의 절차가 먼저 있었고, 그것이 기쁘게도 자연과 맞아떨어진 것은 아닐지 물을 수도 있는 것은 아닐까? 이 문제를 제쳐 두더라도, 의식적 노력의 소산인 예술 작품으로부터 자연의 미로 넘어가는 것이 탐구의 순서에 적합하리라는 것이 베르그송의 의견이다. 

 

 예술의 목적은 우리 의식의 저항적 힘을 잠재워 우리가 순종적으로 되는 가운데, 예술가가 암시하고자 했던 생각을 우리가 깨닫게 하는 데 있다. 우리는 예술 작품 앞에서 우리의 일상적 관심으로부터 벗어나고, 예술이 표현하는 율동은 우리 안에 감정을 새겨넣는다imprimer.

항목 작용
음악 율동과 박자가 우리의 감각과 생각의 일상적 흐름을 정지시키고 우리를 강력하게 사로잡는다.
시인이 느낌을 이미지로 번역해 언어로 표현한다. 우리는 그가 동원한 심상을 마주칠 때 시인이 느꼈을 감정적 등가물을 경험한다. 이때 언어의 운율이 우리를 일상적 관심으로부터 돌려놓는 역할을 한다. 
미술 작품은 움직이지 않지만, 우리는 오히려 생에 급작스럽게 부과된 고정성fixité로부터 일상적 관심으로부터 벗어나는 효과를 얻는다. 작품이 표현하는 감정에 그것의 질료가 어떤 영원성을 부과한다. (조각의 경우, 작품이 표현하는 감동에 돌의 부동성이 영원성을 부여한다.)
건축 형태의 대칭, 건축적 동기의 반복이 운율의 역할을 하며 우리를 일상적 관심으로부터 돌리고, 또 사로잡는다.

 

 자연의 아름다움은 예술과 같이 율동을 활용할 수는 없지만, “주고받은 영향의 공통성을 통해 자연과 우리 사이에 형성된 오랜 친교에 의해 율동을 보충”한다. 특히 자연이 우리의 주의를 온통 빼앗는 조화 (정상적 비율의 존재자)들을 보여줄 때 우리의 감수성은 자유롭게 약동한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느낌이 유발되지causé 않고 암시되기suggéré만 하면 미적 성격을 띨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각주:3](p.36) 이때 이 작품이 얼마나 풍부한 감정을 표현하는가, 그리고 그것이 우리를 얼마나 확실히 일상적 관심으로부터 돌려놓는가에 따라 미적 감정의 다양한 질적 국면을 구분해 볼 수 있겠다. 먼저, 우리는 작품이 우리를 얼마나 사로잡는가에 따라 미적 감정의 강도에 대해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작품이 암시하는 감정이 얼마나 풍부한가에 따라 미적 감정의 높이 (깊이)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예술가는 섬세하고 질적인 내적 감정을 질료 속으로 고정하여, 우리가 일상적 관심에서 벗어나 내놓는 반응 (상태 변화, 강도) 속에서 정의될 수 없는 심적 상태 내에 ‘단번에 자리잡게 한다 (기저의 감정, 깊이)’.

 

 

<도덕감>

 도덕감에 있어서도, 서로 다른 질적 단계들이 있다. 우리는 타인을 연민할 때, 처음에는 그가 겪고 있는 어려움에 대한 두려움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내 타인의 고통 자체를 욕망하며 어떤 ‘겸손해야 할 필요성’, ‘낮아지려는 열망’을 갖게 된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우리가 감각적 이득을 넘어선 어떤 것을 추구하고 있다는 도덕감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2-2. 표면적 노력 (근육의 힘쓰기)

 우리는 지금까지 순수하게 내적인 심리상태들을 살폈다. 그러나 우리가 보았듯 가장 내적인 심리상태라도 신체적 공감과 무관하지 않을 수 있으며, 외부의 원인이 분명히 존재하는 듯 보이는 심리 상태들 (감각)도 있다. 감각은 원인의 크기로 정의될 수 없겠지만, 원인에 반응하는 어떤 신체의 작용이 있다. 이제 우리는 양적인 표상과 어쩔 수 없이 얽혀 있는 것으로 보이는 우리의 작용, 곧 근육의 힘쓰기effort musculaire를 고찰할 것이다. 

 근육의 힘쓰기는 공간상에서 측정 가능하게 나타나고, 우리는 따라서 그것에 대응되는 심리상태 역시 크기를 가지며 측정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베인Bain은 근육운동에 수반되는 감각의 정도가 신경의 원심력에 대응한다고 보았고,[각주:4] 분트Wundt는 자발적인 근육의 작용에 동반되는 중심으로부터의 감각이 있다고 생각했다. 곧, 이들은 “심리적 힘이 내적 공간 속에 압축된 상태로 존재하고 있으며 신체적 노력이란 이 힘이 밖으로 펼쳐지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근육 감각이란 안으로부터 밖으로 나가는 신경적 힘의 원심적 흐름”이라고 본다.”[각주:5][각주:6] 이들의 주장은 마비 환자가 다리를 들어올리려고 할 때 어떤 힘을 느끼기는 한다는 예시에 의해 뒷받침되었다. (곧, 마비 환자는 마비된 부위에서 어떤 운동도 하지 않지만 그에 상응하는 어떤 내적인 힘의 의식을 가진다.) 그러나 윌리엄 제임스는 이 견해에 반대한다. 마비 환자의 경우에도 “모종의 운동이 어디선가는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p.42) 의도된 지점에서 일어나지는 않지만 신체의 다른 지점(들)에서 일어나는 운동들이 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몸속에서 내보내어지는 힘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근육의 움직임으로부터 오는 구심적 감각을 느끼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베르그송은 노력의 느낌이 안으로부터 오느냐 밖으로부터 오느냐를 논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제임스의 입장에 따를 때 우리가 “강도의 지각이 정확하게 어디서 성립하는지”를 알 수 있게 된다고 쓴다. 

 

우리가 주장하는 바는, 주어진 어떤 노력이 우리에게 증가하는 효과를 내면 낼수록, 그와 더불어 수축되는 근육의 수는 더욱 증가하며, 몸의 주어진 한 점에서 더 큰 강도의 노력을 의식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 그 작업에 관여된 신체의 면적이 더 넓음을 지각하는 것으로 환원된다는 것이다. (p.44)

 

 근육의 힘쓰기에 대한 감각은 분명 관여하는 부분들의 면적과 관계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힘쓰기가 몸의 한 지점에서의 힘쓰기에 대응한다고 느끼면서 심적 상태도 양적으로 파악한다. 그러나 실상 근육의 힘쓰기란 “더 큰 수의 주변 감각의 지각”과 그에 따르는 질적 변화에 대한 지각이라는 이중의 지각이다. 

 

2-3. 중간 상태들

 서로 다른 질적 성격을 갖는 심리 상태들의 강도에 대한 분석은, 근육 수축과 주변 감각을 수반하는 관념적 생각 (지적 노력, 주의) 혹은 실제적 차원의 표상 (격렬한 감정, 정조적 감각, 표상적 감각)에도 적용될 수 있다. 우리는 각 심리 상태의 강도가 모두 질적으로 다른 것임을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들의 강도를 어떤 방식으로든 비교하고 평가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베르그송은 어디에서 이러한 양적 표상이 침투해 들어오는가를 폭로하는 것으로, 우리가 앞서 내놓은 심리상태들에 대한 강도적 정의가 주의, 감각 등의 중간적 상태에 대해서도 적용되는 것임을 보이고자 한다. 

 

<주의와 격렬한 감정들>

 먼저 주의attention는 운동을 수반하는데, 그 운동은 주의의 원인도 결과도 아니고 그것의 연장적 표현이다. 분노, 사랑, 증오 같은 격렬한 감정들도 운동을 수반한다. 다만 이 둘은 우리가 그것을 반성된 관념에 의해서 가지게 되었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 구분된다. 이때 이 운동들은 현상의 원인이나 결과가 아니라, 현상에 대한 연장적 표현이다. 감정 혹은 주의의 강도는 이 운동에 있어 관련되는 신체의 면적에 따라 평가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운동들을 제거하면 전적으로 지적인 표상이 따라나온다. 곧, 신체의 작용을 수반하는 주의와 격렬한 감정은 심리상태의 내적 요소들이 주변의 감각들에 자리를 내 주고 밖으로 투사된 결과이다. “그러나 표면적이건 깊은 것이건, 격렬하건 숙고된 것이건, 그러한 감정들의 강도는 항상 의식이 거기서 모호하게 분간해 내는 단순한 상태들의 다수성에서 성립한다.” (p.51)

 

<정조적 감각>

 그렇다면, 양적이고 공간적인 외부 원인에 의존하는 것 같은 감각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베르그송은 (쾌락, 고통 등의) 정조적 감각과 (빛, 소리, 중량 등의) 표상적 감각을 원리상 구분하여 분석한다.[각주:7] 먼저, 우리는 정조적 감각이 외부 원인이 우리에 대해 미치는 진동의 크기에 따라 강해지거나 약해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의 감각은 어디까지나 비공간적이고 질적인 진동에 대한 번역이지 분자운동 자체가 아니다. 이때 이 감각은 외부 대상에 대한 단순한 번역인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신체 속에서 방금 일어났거나 일어나고 있는 일을 표현하는 대신에, 곧 생기려 하는 것, 일어나려는 경향을 보이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p.53) 만약 정조적 감각이 외부의 자극에 대한 우리의 자동운동에만 관계된다면, 감각은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현재와 과거만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그 존재 이유가 없는 것이다. 정조적 상태는 “준비되고 있는 것, 존재하고 싶어 하는 운동이나 현상”에 대응해야 한다. (p.54) 그렇지 않다면 감각은 말 그대로 외부 요인에 의한 기계적 운동에 대한 의식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정조적 감각의 강도는 따라서 어떤 주어진 상황에서 유기체가 그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혹은 그 상황 안에 계속 머물기 위해 취하는 행동으로 평가된다.[각주:8]

 

 

<표상적 감각>

 이제 표상적 감각을 살펴보자. 표상적 감각은 여러 가지 요소들이 섞인 채 우리에게 온다. 먼저 그것이 정조적 감각과 섞여 있는 경우, 우리는 이 경우에도 외부 대상이나 신체의 반응을 토대로 하여 감각들을 양적으로 묘사하고자 한다. 예컨대 외부의 원인이 작거나 약해서, 우리가 그것을 알아차리기 위해 애를 써야 할 경우 우리는 그 감각이 ‘약하다’고 말하고, 반대로 원인이 크거나 강해서 우리에게 침입해 올 경우 우리는 그 감각이 ‘강하다’고 말한다. 같은 시계 소리가 밤에 더 크게 들리거나, 소란스러운 가운데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외국어가 더 선명하게 들리는 경우처럼, 감각들 사이의 비교를 수행할 때에도 우리는 우리의 감각을 크기로 표현한다. 물론 우리가 외부 대상을 받아들일 때 그것이 어떤 식으로든 신체의 반응을 수반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의식이 거의 알아차릴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나타난 질적인 감각에 대해, 외적 원인의 양적 관념을 집어넣으면서 색조나 성질에 불과했던 강도를 크기로 해석한다. 예컨대 손가락을 바늘로 찌를 때 바늘이 들어오는 각 순간에 우리가 느끼는 감각은 그 단계들이 모두 질적으로 다른 것이지만, 우리는 (찔린 손이 아니라) 찌르는 손의 힘쓰기의 정도 (혹은 바늘이 몸 속으로 찔려 들어온 정도?)를 고통의 감각에 투사하여 양적으로 이해한다. 

 소리의 감각에서 정조적 요소, 감각들 간의 비교 등을 모두 제거한 뒤에는 어떤 순수한 질적 느낌만이 남을 것이다. 그러나 그 질적 느낌에 대해, 우리는 그러한 크기와 높이의[각주:9] 소리를 내기 위해 어떻게 목소리를 내야 할지를 떠올리면서, 내적으로 어떤 노력의 감각을 떠올린다. 우리가 이렇게 소리를 내는 근육의 노력과 그것을 설명하는 진동을 소리의 감각에 집어넣는 가운데, “물리학자가 그것을 그에 대응하는 진동의 수로 정의하던 날, 우리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우리의 귀가 양적 차이를 직접적으로 지각한다고 말하게” 된 것이다. (p.68) 열 감각과 중량 감각의 경우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열 감각은 그 자체로 정조적 감각과 결합하기 쉽고, 외부 대상의 성격에 크게 좌우된다. 그러나 감각 자체를 천천히 고찰하자면 그것은 각 단계가 모두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각주:10] 중량의 감각은 감각의 증가가 아니라 증가의 감각이라고 표현함이 정확하다. 그러나 어떤 것을 들기 위해 관여하는 신체의 면적, 우리가 드는 그 어떤 것의 측정된 무게의 표상이 질의 차이를 양의 차이로 혼동하게 하는 것이다. 

 

 빛의 감각에 대해 말할 때도, 우리는 광원의 수와 멀고 가까움에 따라 양적인 표상을 결합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빛의 색이나 강도 자체에 대해서, 그것이 양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물리학은 빛의 색깔에 주목하기는 하되, 사물들이 불변의 고유색을 가진다고 전제할 뿐이지 않은가? 그러면서 어떤 차이가 발생한다면 조도照度와 같은 또 다른 변수들을 끌어들일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닌가? 이런 관점은 우리의 눈이 빛의 강도 자체를 측정한다는 정신물리학적인 주장으로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주지하듯이 빛의 감각 자체를 질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때, 외부 요인들이 양적으로 연속적인 것에 반해 우리의 감각은 매 순간 어떤 질적인 단절을 겪을 것이다. 곧, “그것 (빛)이 변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사실 외부의 빛의 증가나 감소가 새로운 질을 창조하기에 충분할 때만”인 것은 아닐까? (p.76) 감각의 질적 성격을 환기할 때, 물리학에서 말하는 빛 감각이란, 외부의 대상과도 같이 측정될 수 있고 그것에 엄밀하게 상응할 것으로 가정된 ‘보조 미지수’ 같은 것이다. 

 

3. 정신물리학 비판 (pp.78-95)

 한편, 정신물리학에서 탐구할 수 있다고 자처하는 것은 빛 감각 자체이다. 쁠라또와 델푀브는 감각을 서로 비교함으로써 측정할 수 있다고 보았다.[각주:11] 예컨대 서로 다른 회색 A-B의 대비가 또 다른 회색 B-C의 대비와 같다면, 한 감각에서 다른 감각으로 옮겨가는 조도의 등급표를 작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대비의 크기가 정말 동일한 성격의 것인가는 우리에게 문제적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각각의 색조가 모두 질적으로 다른 것이라고 파악하였으므로, 회색들의 대비를 구하라는 요구는 오렌지, 초록, 빨강의 대비를 구하고 비교하라는 것과 같다. 우리는 다만 빛의 조도차가 조명의 증감과 연결되어 있다는 우리의 경험을 개입시켜서 질의 차이를 크기의 차이로 확립할 뿐이다. 베버는 우리가 감각의 변화를 알아차리기 위해 새로 더해지는 자극이 원래의 감각에 주는 영향의 비율이 일정하다고 주장했다. 곧, 감각 S에 대응하는 자극을 E, 변화량을 ΔE라고 할 때, ‘∆E/E=상수.’ 그러나 이것이 성립하기 위해 정신물리학이 설명해야 할 중요한 지점이 있다. “자극과 그 최소 증가의 관계로부터 어떻게 <감각의 양>과 그에 대응하는 자극을 연결시키는 방정식으로 넘어갈 것인가?” (p.83) 

 

 페히너는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해 두 가지를 가정한다. 하나는 자극의 증가에 따라 우리의 감각 S가 증가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감각의 증가 ΔS는 동일하다는 것이다. 베버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자극들을 동질적인 것으로 간주하여 ΔE로 일반화했던 것과 달리, 페히너는 일정하게 증감하는 것은 우리의 감각이라는 의미에서 cE=f(E)라는 관계식을 도입하고 ‘∆S=C*∆E/f(E)’ (C는 상수)로 표현한다.[각주:12] 이때 ΔS와 ΔE가 아주 작은 양이라는 아이디어로부터, ‘dS=C*dE/f(E)’가 나온다. 이에 따라 양변을 적분했을 때 우리는 감각 자체의 양을 구해낼 수 있게 된다. 곧, ‘S=C*∫[0,E]dE/f(E).’ 자극의 증가 ΔE에 감각의 증가 ΔS가 엄밀하게 대응하고, 모든 감각 ΔS는 서로 동일하다. 이 공식을 유도하기 위해 페히너는 두 감각이 같은 크기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크기들을 더할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한다. 곧, 그는 감각을 측정 가능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그 질적 측면을 배제하면서도, 동시에 그 질적인 것을 측정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렇게 한 감각은 원래의 감각에 (자극의 변화에 대응되는) ΔS가 더해진 것으로 파악되고, 모든 감각은 ‘S+ΔS’의 형태로 표현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서로 다른 심리적 상태 S와 S’ 사이를 나누는 간격은 어디에서 성립하는가? 원인과 자극의 차이를 감각의 차이에 엄밀하게 대응시킬 수 있는 권리는 어디에 있는가? 

 

 델뵈프의 독창성은 감각들 간의 산술적 차이를 자의적으로 요청할 뿐인 페히너를 넘어서서, 서로 다른 감각상태들의 ‘대비’에 주목했다는 점에 있다. 그러나 감각의 비교를 위해서는 여전히 감각들이 모두 같은 성질을 갖는다는 점과, 원인의 대비에 감각의 대비가 대응될 수 있다는 점을 가정해야 하지 않을까? “요약하자면 대비는 차이로, 자극은 양으로, 급작스런 도약은 등가성의 요소로 보일 것이며, 그 세 요인을 모두 결합하여 양적으로 동등한 차이라는 관념에 이를 것이다.” (p.90) 그러나 실상 우리가 대비 관계에 집어넣어 고찰해야 할 감각은 무수히 많다. 주어진 두 감각 사이에 끼어 있을 수 있는 감각의 수가 없다는 것을 무엇으로 보장할 것인가? 따라서 델뵈프 역시 감각에 대한 수적이고 양적인 표상을 부당하게 전제하고, 회고적 지성에 의해 탐구의 대상으로 삼을 감각의 종류들을 자의적으로 골라냈다는 혐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게 된다. 베르그송이 페히너와 델뵈프의 방법에 그다지 큰 차이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양적인 것은 질적인 것과 접촉점을 갖지 않는다. 그런데 정신물리학은 정신이 양적으로 탐구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정신을 물리학적 실험의 대상으로 가정해야만 했다. 증명해야 할 것을 전제하지 않으면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는 순환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어디까지나 정신을 양적이고 공간적으로 생각하는 우리의 회고적 지성의 관행적 작용이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이상의 결론은, 심적 상태들은 모두 순수하게 질적으로 다르며, 그 크기를 직간접적으로 비교할 수도 측정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심리상태의 질적인 강도에 의해 외부 원인의 크기를 모종의 방법으로 측정하거나 (외부 원인을 표상하는 의식상태), 심리상태의 어떤 깊은 다수성multiplicité를 갖게 된다 (그 자체로서 충족적인 상태). “그 하나는 밖으로부터 우리에게 외연적 크기의 관념을 가져오며, 다른 하나는 의식의 심연에서 내적인 다수성의 상을 찾으러 가서 표면으로 가지고 나오게 한다.” (p.94)

 

4. 다음 이 시간에

 이 질적인 심리상태는 수적인 다수성과는 어떻게 구별되는가? 공간을 추상했을 때 우리의 심리상태는 무엇이란 말인가? 이 문제를 풀려고 시도했던 이들은 누구였으며, 그들은 어떤 점에서 잘못을 저질렀는가? To be continued...

 

 

 

 

  1. 여기에서 심리상태들의 ‘덩어리’라는 말로 우리는 의식의 상태들이 우리가 공간을 분할하는 것과 같이 구분되어 떨어질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여기에서 베르그송이 심리적 요소‘들’, 혹은 ‘덩어리’들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성질, 색조, 느낌으로서의 깊은 질적 심리상태가 침투해 들어갈 수 있는 질적 다수로 읽어야 할 것 같다. 같은 지면에서 베르그송은 곧바로 “의식 깊은 곳으로 내려갈수록 심리적 사실들을 상호 병치되는 사물들처럼 취급할 권리”가 줄어든다고 쓰고 있다.  [본문으로]
  2. 우리는 앞서 다양한 가능성이 우리 앞에 열려 있는 미래가 기쁨의 원천임을 보았다. 용이함의 느낌은 한 동작이 띠는 (그것이 어떤 것일지는 완전히 예측할 수 없는 것이더라도) 다음 동작의 가능성을 드러내어 준다는 점에서 어떤 즐거움과 기쁨의 원천이 됨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움직임의 용이함을 지각하는 것은 이를테면 시간의 진행을 멈추게 하여 미래를 현재에 잡아두는 즐거움과 합쳐지게 된다.” [본문으로]
  3.  예술에 있어서 우리는 질료화된 예술 작품을 통해 예술가가 그 작품에서 표현하고자 했던 감정을 암시받는다. 예술이 주는 미적 감각은 완전히 자족적인 내면의 깊은 감정이나 암시됨이 없이 느껴지는 신체적 고통 등과 이러한 지점에서 다르다. 우리가 자연을 (실제 그렇지는 않지만) 어떤 의미에서 예술가로 본다면, 자연 역시 어떤 조화를 질료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때 우리는 자연에 공감하면서 (가정적으로나마) 암시된 어떤 느낌이 우리 안에 새겨지는 것을 느낀다. 곧, 예술은 1) 우리를 일상적 관심으로부터 돌려놓으면서, 2) 작품 혹은 자연이 표현하고자 했던 암시된 감정을 우리 안에 새겨넣는다. 1)의 측면은 아름다움의 강도, 2)는 아름다움의 깊이에 대응한다. 이것이 이어질 내용의 주제이다. [본문으로]
  4. 곧, 어떤 측정 가능한 힘에 대응한다고 보았고, [본문으로]
  5. 황수영, 《베르그손》, pp.35-36. [본문으로]
  6. 이때 내적인 힘이 방출된 결과로서 양적으로 측정이 가능한 신체의 운동이 나타나는 것이므로, 우리는 이 내적인 힘이 어떤 양적인 속성을 갖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본문으로]
  7. 정조적 감각과 표상적 감각은 대개 서로 뒤섞여 있으며,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옮겨갈 수 있다. 그러나 베르그송은 인위적으로나마 이들 요소를 구분하여 세심하게 탐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본문으로]
  8. 주어진 상황에서 벗어나려는 정조적 감각인 ‘고통’의 강도는 “의식이 보는 앞에서 그 고통에 동조하고 반응하는 신체 부분들의 수와 범위”이다. 반대로 그 상황에 계속 남아 있으려는 경향은 ‘쾌락’의 강도는 다른 감각을 거부하고 거기에 빠져 버리는 신체의 무기력의 정도이다. 곧, 강한 고통이 퍼지는 것이 아니라 퍼지는 고통이 강하다. 강한 쾌락이 우리를 사로잡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로잡는 것이 강한 쾌락이다.  [본문으로]
  9. 소리의 ‘높낮이’라는 공간 표상 역시, 높은 소리는 머리 부근에서, 낮은 소리는 가슴 부근에서 울린다는 느낌이 주는 수직적 표상이 침투한 결과일 수 있다. [본문으로]
  10. 말하자면, 온도의 양적 증가가 어느 순간 발생하는 ‘뜨겁다’는 감각의 질적 전환을 담보한다고 말할 수 있는 요소가 정말이지 없다.  [본문으로]
  11. 델뵈프Joseph Delbœuf (1831-1896)은 벨기에의 수학자, 철학자, 심리학자로 최면술에 관해 다양한 저작을 남겼다. 쁠라또Joseph Plateau (1801-1883)는 벨기에의 물리학자, 수학자로 움직이는 이미지의 착시 효과에 대한 해명 시도로 알려져 있다.  [본문으로]
  12. 곧, 서로 다른 자극에 대해서도 감각은 일정하게 증가한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