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작가별 분류)/Henri Bergson

앙리 베르그송,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1차시

CucuClock 2023. 9. 16. 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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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베르그송, 《시론》 1차시

2023.09.15.

분량: 《시론》 해제 (pp.293-363)

0. 베르그송의 생애

 앙리 베르그송은 1859년 폴란드계 유대인 아버지와 아일랜드계 유대인이자 영국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재능 있는 음악가였으나, 앙리가 열한 살 때 앙리를 남겨둔 채 런던으로 이주해 피아노 개인교습 등으로 생계를 이어가다 생을 마감한다. 어머니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많지 않지만, 앙리는 매주 한 번씩 어머니에게 편지를 썼고 그녀의 헌신과 종교적 심성에 대해 자주 존경을 표했다. 영국인 어머니를 둔 덕에 앙리는 영어에도 능통했고 영국 철학자들에게도 관심을 가졌다.

 베르그송은 어려서부터 아주 예의바른 소년이었고, 콩도르세 고교 시절에는 “전국 학력경시대회에서 수학, 라틴어 작문, 프랑스어 작문, 영어에서 1위, 기하학에서 2위, 그리스어 작문과 역사에서 4위를 차지했다.”(p.296) 특히 몇몇 수학 문제에 대한 그의 해법은 너무도 완벽해서 수학 전문지에 소개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칠판 앞에서 풀기만 하면 되는> 수학을 포기하고 고등사범학교ENS 철학과에 3위로 입학한다. 그는 수석으로 입학한 (훗날 프랑스의 사회주의를 이끄는) 장 조레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 등과 동기였다. 성년이 된 베르그송은 정식으로 프랑스 국적을 취득하고,[각주:1] ENS를 졸업하면서 철학 교수 자격시험을 통과한다. 베르그송의 강의는 머릿속에 있는 것을 또박또박 완벽한 문장으로 말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고 전한다. 앙제 고등학교와 클레르몽-페랑 고등학교에서 7년여간 강의한 이 시기에 그는 박사학위논문이자 첫 번째 주저인 《시론》을 완성한다. 베르그송이 박사학위를 취득한 것은 베르그송이 파리에 다시 도착한 뒤, 그러니까 《시론》이 완성된 지 적어도 2년 뒤였다. “베르그송은 사실 그의 모든 저술은 완성된 후 적어도 2년 이상 묵혀 두었다가, 다시 보아 출판해도 무난하다고 판단될 때에만 발표한다는 원칙을 끝까지 지켰다.” (p.300) 33세가 되던 해에는 루이즈 뇌뷔르제 (당시 19세)와 결혼했다. 이날 결혼식에는 뇌뷔르제의 사촌 여동생의 아들이 꼬마 들러리를 봤는데, 그 꼬마는 마르셀 프루스트였다. 37세에는 《물질과 기억》을 발표하고, 1898년부터 ENS의 전임강사, 1900년에는 콜레주 드 프랑스의 그리스-라틴 철학 교수, 1904년에는 가브리엘 타르드의 뒤를 이어 현대철학 담당이 된다. 꼴레주 드 프랑스는 프랑스만의 독특한 교육기관으로, 유수의 학자들이 초빙되어 강의하고 누구나 그 강의들에 참여할 수 있지만 시험을 보지도 학위를 수여하지도 않는다. 베르그송은 이러한 이유에서 제자들을 길러내거나 학파를 이루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르그송의 강의는 아주 인기가 많아서 창문에 매달려 강의를 듣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베르그송은 꼴레주 드 프랑스 교수가 된 이후 같은 해에 《웃음》, 1907년 《창조적 진화》를 발표하며 세계적인 철학자가 된다. 이 시기 《웃음》을 제외한 그의 모든 책들이 교황청의 금서 목록에 오르지만 베르그송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세계 1차 대전이 발발하자 베르그송은 여러 대학에 파견되어 전쟁에 대해 강연하고 1917년에는 미국에 방문해 윌슨 대통령의 미국 참전 결정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전쟁 이후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은퇴한 베르그송은 유네스코의 전신이었던 국제연맹 산하 지적협력 국제위원회 (CICI) 의장으로 활동한다. 1925년 류머티즘으로 거동이 불편하게 되자 베르그송은 의장직에서 물러나 7년 후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을 발표한다. 그 사이에 1928년에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다.

 베르그송은 1941년 1월, 독일군이 점령한 파리의 추운 겨울에 세상을 떠났다. 그가 내뱉은 마지막 문장은 “여러분, 다섯 시입니다. 강의는 끝났습니다.”였다. 1967년 프랑스 정부는 팡테옹에 그를 기념하는 문구를 새겼다. 

 베르그송이 가톨릭으로 개종했는가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었으나, 베르그송이 유언장에 ‘반유대주의의 거대한 물결이 세계로 퍼져 나가는 것을 보지 않았다면 나는 개종했을 것이다’라고 쓰고 있다는 점에서 그가 개종한 것은 아니라는 의견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그가 종교들 가운데 가톨릭에 가장 깊이 공감했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베르그송이 세상에 내놓기를 원했던 책은 4대 주저와 논문집 두 권, 《웃음》뿐이었다. 상대성이론의 시간론을 지속의 관점에서 비판한 《지속과 동시성》은 자신이 상대성 이론을 잘못 이해했을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에 주요 저술에서 제외되었다. 

 그러나 베르그송 사후 그의 글에 대한 출간 작업은 계속되어서, 《지속과 동시성》은 물론 박사학위 부논문 <아리스토텔레스의 공간론>, 발표되지 않은 글들과 편지들을 모은 《잡문집》, 4권 분량의 강의록 등이 출간되었다. 한국의 유지석 박사는 《잡문집》에 포함되지 않았던 434편의 편지를 발견하여 분석하여 박사학위를 받기도 했다. 

 

  1. 베르그송의 철학

 베르그송의 철학은 ‘지속’의 철학이다. 그리고 지속이란 연장과도 같이 나눌 수 있거나 감각 혹은 지성으로 포착할 수 없는 운동 그 자체를 가리킨다. 예컨대 종이 위에 표시되는 이 활자들은 나의 손가락이 움직여 만들어 낸 공간적인 결과물이지만, 내 손을 움직이게 한 것은 완전히 까뒤집어 보여질 수는 없는 나의 정신이다. (활자뿐 아니라 말에 대해서도 이와 같이 이해해볼 수 있다. 입 밖으로 내어진 나의 말소리는 어디까지나 공간적인 것이다.)

 

바로 그 정신에 해당하는 것, 무한히 풍부하여 그때그때 자신의 극히 일부분만을 공간 위에 펼쳐 보일 뿐인 것, 공간으로 향해 있는 우리의 감각이나 지성에는 보이지도 포착되지도 않는 것, 그러나 단지 추상물이 아닌 진정으로 실재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운동 그 자체이다. (p.310)

 

 그러나 베르그송 이전, 종래의 형이상학은 이러한 운동 자체보다는 운동체나 그 운동체의 궤적에만 집중해 왔다. 베르그송은 운동체와 그 궤적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어디까지나 공간적 사고와 우리의 지성이 만들어 낸 표피적 추출물이라며 비판한다. 베르그송이 보기에 제논의 역설과 같은 문제가 발생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각주:2] 제논은 분할될 수 없는 운동 자체를, 상호 병치적이어서 분할 가능한 공간적인 것으로 파악한 것이다.  지속에 대한 이 아이디어로, 베르그송은 정지체 중심의 형이상학을 뒤집고자 한다. “본질에서 기능으로, 형상에서 지속으로, 공간에서 시간으로, 닫힌 우주에서 열린 우주로, 형태에서 유전으로, 성년 중심에서 연속성의 담지자인 씨앗 중심으로, 도덕률에서 상황으로, 무감동에서 참여로...” (p.311) 베르그송에게는 운동이야말로 실재적인 것이며, 정지된 것은 운동으로부터 지성이 사후적으로 끊어낸 추출물에 불과한 것이다. 곧, 세계에는 “운동이 존재”한다.

 

 베르그송의 이 주장이 “존재는 운동”이라는 헤라클레이토스적인 주장과는 구분되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곧, 그 어떤 것도 고정적일 수 없고, 자기동일성도 가질 수 없다는 주장과는 다르다.) 지속하는 것은 운동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임을 잃지 않는다. 곧, 지속하는 것은 자기동일성을 유지한다. 운동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임을 유지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해 보이지만, 모든 운동은 얼마간 지속을 포함하고 있다. 시간을 요하는 모든 운동이 어떤 자기동일성을 담보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각설탕을 물에 녹일 때 각설탕은 (자기동일성을 유지한다는 의미에서) 얼마간 자기 자신을 잃지 않으려고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앞서 들었던 각설탕의 예시는 언젠가 자기동일성을 상실하게 되는 물질적인 대상의 지속이다. 시간이 걸리되 (곧, 자기동일성을 유지하고자 하되) 언제까지고 그 자기동일성을 상실하지 않는 운동이란 있을까? 플라톤이 모든 유한자의 원류로서 어떤 ‘이념Idea(이데아), 완벽한 존재, 능동자’를 도입했던 것처럼, 베르그송이 도입하는 이념은 ‘생명’ 혹은 ‘순수 지속durée pure’이다.
 운동은 운동체를 과거의 상태와는 달라지도록 한다는 점에서 타자화를 포함한다. 그러나 순수 지속은 “타자화의 필연적 법칙이 지배하는 물질을 극복하고, 거기에 비결정성을 부여”한다. (p.314) 순수 지속은 이 비결정성을 유지하며 가능하다면 더 큰 비결정성을 구현하려고 한다. 이 비결정성은 물질세계의 조건문적 인과율과는 다르다. 그것에 의해 어떤 비약élan (‘약동’으로 번역되기도 함)을 포함하므로, 전건에 없던 것이 후건에 나타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생 혹은 순수 지속이란, 자기 자신이되 끊임없이 자신을 뛰어넘는 것, 그러나 언제나 자기동일성을 유지한다는 점에서 이미 자신을 뛰어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일견 모순율에 어긋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모순율이란 우리의 지성이 잘라낸 물질계의 정지체에 해당하는 법칙일 뿐이다. “진정한 운동은 매순간 모순을 극복하면서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낸다.” (p.315)

 우리는 신체적 기억과 정신적 기억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기동일성을 유지하지만, 당장 눈  앞에 있는 돌은 계속 그 돌인 채로 있는 것 같지만 수없이 진동하며 변하고 있다. 우리가 그들이 자기동일성을 한사코 유지한다고 보는 것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존재 양식을 사물들에 투영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의 자기동일성을 담보하는 것은 다름아니라 기억이다.

 그런데 우리가 타자화하는 운동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이려면, 매 순간 우리의 과거를 버리지 않고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지 않으면 기억되지 않는 그만큼은 자기동일성을 잃을 것이며, 따라서 그만큼은 타자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p.317) 그러나 매 순간 모든 것이 기억난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베르그송이 보기에 우리의 뇌는 기억의 기관이기보다는 차라리 망각의 기관이다. 뇌는 평소에 즉자적 기억을 누르고 있다가 그때그때 필요한 것에만 문을 열어준다. 이 내용이 최초로 다루어지는 책이 《물질과 기억》이다. 지각이 탈공간화되어 기억이 되는 과정을 밝힘으로써, 물질과 정신이 만나는 과정이 이 책에서 설명된다.

 또, 형상에서 지속으로 형이상학의 중심이 옮겨올 때, 우주는 완결되지 않은 채 미래로 열려 있는 것이 된다. 모든 것이 주어져 있는 우주는 없다. 모든 것이 새롭게 주어지는 우주만이 있다. 이 내용은 방대한 사례와 함께 《창조적 진화》에서 해명된다.

 더불어 지속의 철학에서는 모든 것이 매 순간 새롭게 주어지므로, 정해진 본질이나 절대적인 도덕률 따위도 없다. 매번 다른 것만이 돌아오므로, 그렇게 돌아오는 상황에서 어떻게 참여하고engager 행동하느냐가 문제가 된다. 도덕과 종교에 대항하여 이 주제를 다루는 책은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이다.

 

2. 《시론》의 배경

 《시론》은 베르그송의 첫 번째 주저이자 박사학위 논문이다. 베르그송은 제논의 역설을 설명하던 중 지속 개념을 고안하고 과학적 시간 개념, 양과 질을 연결하는 강도 개념에 대한 연구, 당시 유행하던 정신물리학에 대한 연구 등을 담아 2장을 완성한다. 논문의 1장은 그 뒤에 쓰였음이 알려져 있다.

 심리학에 대한 베르그송의 이 연구는 제논의 역설로부터 출발하여 과학적 시간 개념에 대한 탐구 끝에 도달한 것이다. 곧, 심리학은 당초 그의 관심사는 아니었다. “사실을 따라가면서 지속의 입장에서 그 사실들을 바라보니 희한하게도 맞아떨어졌다는 것이다.” (p.325) 베르그송은 따라서 심사위원들이 그의 지속의 아이디어를 알아보고 중요하게 평가해 줄 것을 바랐으나, 정작 그것이 다루어지는 2장에는 심사위원들이 관심을 보여 주지 않아 실망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래도 논문은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3. 《시론》의 내용

 

《시론》은 모두 세 개의 장과 결론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1장은 양과 질, 연장적인 것과 비연장적인 것을 구별하는 서론이며, 제2장은 공간이나 공간적 시간과 다른 지속 그 자체를 밝히는 핵심 부분이고, 제3장에서는 그 지속의 개념을 자유의 문제에 적용하여 문제 자체의 해소를 시도한다. (p.329)

 

3-1. 제1장 <심리상태들의 강도에 관하여>[각주:3] 여기에서는 심리상태들이 비연장적이며 각각 질적으로 달라서 그 강도를 연장적인 것과 같이 양적으로 측정할 수 없다는 주장이 다루어진다. 베르그송은 가장 깊은 감정상태로부터 근육의 힘쓰기를 포함하는 표면적 심리상태로 나아가면서 이것을 보이고자 한다. 곧, 덜 공간적인 심리상태로부터 가장 공간적이고 양적인 심리상태로 순서대로 해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후에는 깊은 심리상태와 표면적 심리상태에 공통적인 ‘강도’ 개념을 도입한 뒤, 그 중간 단계를 주의, 격렬한 감정, 정조적 감각, 표상적 감각, 정신물리학의 순서로 고찰한다.

 

 먼저 욕망, 희망, 기쁨, 슬픔 등의 깊은 감정의 경우, 우리는 같은 심리적 상태가 의식의 부분을 덜 혹은 더 차지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 각 단계가 모두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기쁨: 미래로의 정향 -> 미래가 우리를 당기는 듯한 느낌 -> 매 순간의 새로움, 존재의 경이로움

슬픔: 과거로의 정향 -> 미래가 닫힌 것 같은 느낌 -> 무를 갈망, 모든 것이 무의미한 상태


 

 다음으로 미적 감정에 관하여 우아함과 아름다움의 느낌이 분석된다. 즉, 

 

우아함: 편안함, 용이함 -> 예견 가능성 -> (율동성, 음악성) 신체적 공감 -> 동적 공감 (신체+정신적 공감)

 

아름다움의 강도 (얼마나 사로잡는가? 얼마나 일상적 관심으로부터 돌려놓는가?) 

: 관심을 돌릴까 말까한 상태 -> 관심을 돌렸으나 현실적 심리상태가 남아 있는 상태 -> 우리의 영혼을 몽땅 사로잡는 상태

아름다움의 깊이 (감각, 감정, 사유의 풍부함. 각각의 감동은 역시 질적으로 다름)

 

  도덕감으로서의 연민에 대한 분석은 다음과 같다. 낮은 단계의 연민은 고통을 혐오하고 두려워하는 데서 시작하지만, 진정한 연민은 타인의 고통을 함께 겪고 그것을 덜어주려는 생각과 결합한다. 따라서,

 

연민: 혐오 -> 두려움 -> 공감 -> 겸손함 (낮아지려는 열망).

 

 지금까지의 분석은 순수하게 마음속에서만 일어나는 것 같은 감정들에 대한 것이었지만, 많은 경우 이들은 신체적 징후를 동반한다. 질적인 심리상태와 근육의 움직임 (표면적 노력) 사이의 관계는 어떻게 이해되어야 할까? 베르그송은 그들의 강도가 모두 “질적으로 다른 진전과 증가하는 복잡성”으로 정의된다고 쓴다. 근육의 움직임의 세기는 한 지점에서의 노력에 따라 증가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관여하는 신체의 면적에 따라 증가한다. 그러나 감각 자체는 관여하는 부분들의 수에 따라 일정하게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질적으로 달라진다. 그러나 공간적으로 사유하는 습관을 가진 의식은 흔히 표면적 노력을, 신체의 한 지점에서 노력의 증가 혹은 하나의 같은 감정이 증가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각주:4][각주:5]

 

 이제 깊은 심리상태와 표면적 노력 사이의 중간적 단계들을 살펴보자. “주의는 단지 정신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신체의 운동을 동반한다.” (p.333) 그것은 순전한 심리적 현상이었다가, 긴장이 더해감에 따라 근육 수축의 느낌을 가져오는 것이다. 이때 이 근육 수축을 불러오는 관념은 알려고 하는 의식적이고 반성적인 관념이다. 

 격렬한 감정들은, 한 관념에 의해 근육의 수축이 수반된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그 관념이 “행동하려는 비반성적 관념”이라는 점에서 주의와 다르다. 예컨대, ‘싸우려 한다’는 분노의 관념은 빨라지는 심장의 박동, 이빨 앙다물기 등의 작용을 수반한다. 

 감각은 쾌락과 고통의 감각인 정조적affectif 감각과 외부의 진동을 받아들이는 표상적représentatif 감각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때 감각은 외부의 진동에 대응하는 내적 반향이 아니라, 내적인 비공간적 심리상태이다. 따라서 먼저 정조적 감각은, “신체에 일어났거나 나고 있는 일을 알려주기보다는, 일어나려는 일을 표현한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p.334) 곧, 감각은 과거에 일어난 일을 그대로 표현하는 작용이 아니라 유기체 안의 고유한 미래지향적 작용이다. 쾌락과 고통의 감각을 지닌 유기체는 이 예견적인 감각으로부터 미래의 행동의 선택지를 가지게 되고 자유로운 운동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곧, 마주친 상황을 벗어나고자 노력할 것인가, 아니면 거기에 계속 머물고자 할 것인가?[각주:6] 전자의 경우 고통의 감각, 후자의 경우 쾌락의 감각이다. 이때 그 상태에 어떤, 그리고 얼마나 많은 신체의 부분이 관여하는가에 따라 그들 쾌락과 고통은 모두 질적으로 다른 심리상태가 된다. 곧, 정조적 감각의 강도는 그것에 수반되는 신체적 반응 운동에 따라 평가된다. 표상적 감각의 강도 역시도 그것에 수반되는 신체 반응에 따라 평가될 수 있다. 표상적 감각이 아주 작을 경우, 우리는 그것을 붙잡으려고 애쓴다. 평상적인 감각의 경우에도,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신체적 반응을 수반한다. 곧, 표상적 감각에 관해 우리는 “외부 원인의 차이를 질적으로 다른 느낌에 집어넣은” 것이다. (p.336)

 

 이렇게 하여 의식상태란 가장 깊은 상태부터 그 가장 표면적인 양태인 신체적 징후, 그 중간 상태인 상태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질적이고 역동적이며 외연적이고 공간적인 것과는 관계가 없다.  

 

 이러한 베르그송의 분석에 반해, 정신물리학은 감각 자체를 측정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서로 다른 두 감각을 측정하려면 각각에서 질적인 것을 제거해야 하는데, 측정하려는 것이 바로 그 질적인 감각이므로 측정은 가능하지 않다. 베르그송의 관점에서 이들은 모두 질을 양화하여 측정할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의식에 대한 탐구에서 공간 표상이 이렇게나 은밀하고 강력하게 침투하게 된 것일까? 이 오류의 근원을 추적하고 지속하는 것으로서의 의식상태를 길어내는 것이 이어질 2장의 목표이다. 

 

3-2. 제2장 <의식상태들의 다수성에 관하여: 지속의 관념>

 2장에서는 의식상태의 다수성multiplicité이 수적 다수성이 아니라, 그 요소들이 상호침투하고 유기적으로 조직화되는 질적 다수성이라는 주장이 다루어진다. 

 다수성에는 두 종류가 있다. 수적 다수성을 논할 때, 우리는 언제나 공간 속에 병치될 수 있다고 생각된 연장적 단위를 경유한다. 곧, 거기에는 항상 공간의 관념이 들어간다.[각주:7] 한편, 질적 다수성은 수의 모습을 띨 수 없는 의식적 사실들과 같이, 비공간적이고 상호 침투하는 다수에 관한 것이다. 곧, 전자는 동질적인 공간에, 후자는 이질적인 질들에 관련된다. 우리는 시간에 대해 생각할 때도 동질적 공간의 표상을 끌어들이곤 한다. 그러나 의식의 상태들이 전개되는 시간, 곧 순수 지속은 공간적이지 않다. 그것은 구체적이고 질적인 변화 속에서 느껴지는 시간이다. 자아는 변화하면서도 자기동일성을 유지하고, 서로 다른 질적 상태들을 포함하며 전체를 이룬다. 그것은 동질적인 공간이나 측정 가능한 양과는 상관없는 것으로서, 측정될 수 없다. 만약 우리가 시간을 분절된 것으로 여기고 측정할 수 있다고 여긴다면, 그것은 우리의 의식이 외부세계의 분절을 지속에 도입하여 “동질적 시간이라는 공간의 제4차원”을 창조했기 때문이다. 공간상에 존재하는 것은 물체가 차지하는 위치밖에 없다. 

 

 따라서 제논의 역설과 같은 문제가 발생하는 이유는, “운동이 지나간 공간적 궤적과 운동 그 자체를 혼동”했기 때문이다. 지나간 공간은 무한히 나누어질 수 있을지언정, 운동 자체는 나눌 수 없다. 과학에서 다루는 운동 역시 운동 자체가 아니라, 공간상의 변화를 수적으로 측정할 뿐이다. 우주의 모든 운동이 두세 배로 빨라진다고 가정할 때, 과학적 측정의 결과에는 변함이 없겠으나 의식은 어떤 질적인 느낌을 가질 것이다.

 여기에 더해, 동질적 공간의 ‘구별되는 (수적) 다수성’이란 질적 다수성 없이는 가능하지 않은 것이다.“단위들을 셀 때, 그 단위들이 공간 위에 도열되는 한편 그것들 상호간에 유기적 조직화가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p.343)

 우리는 의식적 삶의 두 측면을 구분해야 한다. 하나는 외부세계에 접해 있고 그 공간성이 침투해 있는 비인격적 자아, 다른 하나는 직접적으로 의식에 주어지는 지속을 느끼고 언제나 진행 중에 있는 내적 자아이다. 이 내적 자아는 안정되거나 공통적인 언어로 쉽게는 표현될 수 없다. “의식의 표면으로 나갈수록 그것은 점점 더 수적 다수성의 형태를 띠고, 공간에 펼쳐지는 경향을 갖는다.” (p.345) 이렇게 보자면 유능한 소설가들은 고정된 언어의 틀을 돌파하여 우리에게 섬세한 질적 느낌을 갖도록 해 주는 이들이다.

 

3-3. 제3장 <의식상태들의 조직화에 관하여: 자유>

 3장에서 베르그송은 지속의 관점에서 물리적 결정론, 심리적 결정론, 주어진 선택지 가운데 하나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는 자유주의론을 비판한다. 결론적으로 그는 시간은 공간에 의해 충분히 표상될 수 없다는 주장을 통해 현재를 살아내며 어떤 비규정성을 만들어 내는 자아의 자유를 길어내고자 한다.

 자유에 반대하는 결정론적 입장에는 물리적 결정론과 심리적 결정론이 있다. 물리적 결정론은 한 시점에서 어떤 유기체를 이루는 분자들의 위치와 운동을 안다면 그 유기체의 심리상태도 알 수 있다는 견해로, 에너지 보존 법칙을 생명체에까지 적용하려는 시도이다. 그러나 물리적 결정론을 옹호하려면 먼저 어떤 물리적 상태에 하나의 특정한 심리적 상태가 엄밀하게 대응한다는 것을 입증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물리적 운동에 관한 한 우리는 계산 체계에 들어올 수 있다고 가정된 것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수 있을 뿐이므로, 에너지 보존 법칙이 심리상태에까지 적용 가능하리라고 주장할 수 있는 마땅한 근거는 없다. 또, 물리적 운동의 세계에서 세계는 영원한 현재에 머물지만 (그리고 과거의 어떤 상태가 똑같이 복원될 수 있는 것이지만)2, “의식적 존재자에게 과거는 하나의 실재”이다. (p.347) 곧, 이들은 흘러간 시간을 보존하고 끊임없이 어떤 덧붙임을 가지며 에너지 보존 법칙을 벗어나는 것이다.

 물리적 결정론은 심리적 결정론으로 환원된다. 왜냐하면 심리적 결정론은 이전의 어떤 의식상태가 이후의 의식상태를 결정한다는 주장이고, 물리적 결정론은 이 각각의 의식상태가 어떤 물리적 상태에 대응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물리적 결정론에 의지하지 않는 심리적 결정론은 어떨까? 베르그송이 보기에는 이 시도 역시도 지속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 기초해 있다. 예를 들어 연상심리학의 경우를 보자. 이전의 의식상태가 현재의 의식상태의 원인이라는 주장은, 이미 우리가 어떻게 행동할지를 결정한 후 그 행동에 부여한 사후적 이유를 제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연상심리학의 관점에서 수행하려는 행위와 그 행위의 원인이 되는 관념은 자아를 (서로 구분되는) 심리상태들의 조합으로 보는 입장으로부터 온다. 그러나 의식의 상태는 상호침투적이고 권리상 인위적으로 구분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자아의 모든 활동이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자아의 표면에 드러나는 행위부터 자아 전체를 표현하되 고유한 내적 상태로 있는 근본적 자아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어떤 자유의 정도차를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우리는 외부로부터 들어와 자리잡았거나, 기억 속에 응고된 관념에 의해 생각하고 움직이기도 한다. 이 경우 우리는 결정론을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의도치 않게 의식의 심층으로부터 올라오는 격동이 있다. 혹은, 고착된 상태를 깨면서 생겨나는 어떤 사건이 있다. 이러한 사건들을 낳는 것은 우리의 자아 전체이다. 

 이 지점에서 베르그송은, 우리가 주어진 몇 가지 고정된 선택지 가운데 하나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자유론자들과도 거리를 둔다. X를 선택할 수도 있었고, Y를 선택할 수도 있었던 자아는 없다. 오직 그때에 상이한 여러 질적 상태를 오가며 망설이는 하나의 자아만이 있다. 오히려 자유를 정해진 선택지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능력으로 정의한다면, 그것은 논리적으로 가장 단호한 결정론으로 이행하는 길이다. 왜냐하면 이 경우 우리는 다른 선택지가 있었음에도 자아가 왜 그 선택지를 고르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도 해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다른 길은 열려 있으나마나 이미 선택한 바로 그 길로밖에는 갈 수 없었던 셈이 된다.” 베르그송은 X와 Y라는 선택지는 언제나 이미 선택이 일어난 뒤에 행해지는, 의식 활동에 대한 도식적인 범주화라며 비판한다.

 이렇게 볼 때, 모든 전제 조건이 주어졌을 때 한 유기체의 활동을 완벽히 예측할 수 있다는 주장은 별로 유익한 것이 못 된다. 그것은 실은 그 유기체의 활동을 예측하는 것이기보다는 과거의 행적에 비추어 판단을 내리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모든 전건이 애초에 주어질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던져봄직하다. 왜냐하면 모든 상황을 알기 위해서는 애초에 그 사람 자체가 되거나 (이것은 불가능하다), 미래에 일어날 일까지 모두 알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미래의 활동을 예측하고자 한다는 가정에 위배된다). 매 순간 새롭게 상황을 구성하고 고민하며 선택을 내리는 하나의 자아만이 있다. 

 이제 결정론과 자유로운 행위에 대한 베르그송의 입장을 정리하자. 결정론과 자유론은 모두 끊임없이 변동하고, 따라서 측정될 수 없는 의식 활동의 본질을 잘못 이해한 결과이다. 곧, 의식의 활동이 예견될 수 있거나, 정해진 선택지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는 주장은 우리의 의식을 부분 단위로 추출하거나 공간적으로 다룰 수 있다는 착각으로부터 온다. 오히려 “의식의 시간은 그것과 완전히 다른 질서이며 단 일초라도 단축하면 전체가 달라지는 지속이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가 없다.”[각주:8] (p.353) 의식의 활동이 물리적 대상들이 물리 법칙에 종속하는 것과 같이 어떤 법칙을 따른다는 주장도 마찬가지이다. 의식의 어떤 순간도 같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지속하는 의식상태는 유기체가 동일한 여건에서도 다르게 움직일 수 있도록 한다. 그런데 인과율과 같은 법칙을 우리의 의식에 대해 적용하자면 이러한 지속의 작용은 배제되고 마는 것이다.  

 

 

3-4. 결론

 결론부에서 베르그송은 지금까지의 논의를 요약하고, 이를 토대로 칸트 철학과 대결하고자 한다. 

 베르그송의 기획은 우리 자신이 우리의 의식을 외부세계의 존재양식을 빌어서만 이해하고자 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심리상태의 강도, 지속, 의지적 결정으로부터 공간 관념을 털어 내고 그 진정한 모습을 드러내려 한 것이 지금까지의 내용이다.” (p.358)

 베르그송의 관점에서 볼 때, “칸트의 잘못은 시간을 동질적 장소로 간주한 것이다.” 그는 어디까지나 시간을 질료가 들어올 수 있는 형식으로 파악했고, 거기에는 알게모르게 공간적인 표상이 숨어 들어왔다는 것이다. 시간이 동질적이라면, 시간은 같은 사건이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장소가 되고 자유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되고 만다. 그리고 나서 칸트는 우리의 ‘자유’ 개념을 감성계에서는 발견될 수 없는 것, 그리고 초월적 세계에만 존재하는 것으로 넘겨 버린 것이다. 

 

의식의 상태들을 서로로부터 떨어져 응고된 결정체로 보는 순간, 연상주의자와 결정론자가 출현하여 자유를 금지하거나, 칸트주의자가 출현하여 자유를 신비의 영역으로 끌고 갈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 있는 지속의 입장에 선다면, 자유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며, 그것을 부인하는 것은 시간과 공간, 계기와 동시성, 지속과 연장성, 질과 양을 혼동하는 데에서 오는 착각일 뿐이다. (p.359)

 

 

 

 

 

  1. “이것은 프랑스에서 태어난 사람은 성년이 되면 선택에 따라 프랑스 국민이 된다는 당시의 법에 따른 것으로, 귀화와는 전혀 다르다.” (p.298) [본문으로]
  2. 제논의 역설은 크게 세 가지 문제로 제시된다. 첫째, 이분법의 역설Paradox of the Dichotomy. 우리는 한 발짝 움직이기 위해 반 발짝을 먼저 떼야 하고, 반 발짝을 떼기 전에는 반의 반 발짝을 떼야 하고... 이렇게 무한히 이어진다. 우리는 걷기를 시작할 수조차 없다. 둘째, 아킬레우스와 거북이의 역설Achilles and the Tortoise. 달리기가 빠른 아킬레우스가 거북이와 경주를 하는데 거북이는 아킬레우스보다 앞에서 출발한다. 아킬레우스가 원래 거북이가 출발한 위치에 도달했을 때, 거북이는 얼마간 앞으로 움직였을 것이다. 또 아킬레우스가 그 시점에 거북이가 있던 위치에 도달했을 때, 거북이는 역시 앞으로 움직였을 것이다. 이렇게 아킬레우스는 영원히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없다. 셋째, 화살의 역설. 화살은 과녁에 도달하기 위해 중간 지점을 통과해야 하고, 다시 남은 거리상의 중간 부분을 통과해야 하고, 다시 중간 부분을 통과해야 하고... 이렇게 무한히 이어진다. 따라서 화살은 영원히 과녁에 가닿을 수 없다. [본문으로]
  3. 특히 여기에서 베르그송은 19세기 말, 의식상태를 양화量化할 수 있다는 페히너Fechner 등의 심리물리학la psychophysique과 대결하고자 하고 있다. 그에게 의식이란 양화될 수 없는 연속적 흐름이자, 각각의 상태가 고유한 질적 전체를 이루는 내적 삶이다.
    황수영, 《베르그손》, pp.31-33. [본문으로]
  4.  따라서, 공간 표상에 의해 표면적 감각에 대해 범해지는 오류는 두 가지: 1) 표면적 노력의 증감을 신체의 한 지점에서 노력의 증감으로 생각하기, 2) 표면적 노력의 증감에 대응하는 감각이 질적으로 동일하며, 양적으로 증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베르그송에 따르면, 표면적 노력의 증감에 따라 수적으로 더 많거나 적은 신체의 부분이 작용하고 그에 따르는 감각 자체는 모두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본문으로]
  5. 신체적 노력에 관한 견해로 베르그송이 참조하는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심리적 힘이 내적 공간 안에 압축된 상태로 존재하고 있으며 신체적 노력이란 이 힘이 밖으로 펼쳐지는 것 (원심적 운동)”이라고 생각하는 베인Bain이나 분트Wundt의 이론이고, 다른 하나는 서로 다른 신체 부위들의 노력이 구심적으로 되돌아와 어떤 질적인 심리 상태를 이룬다는 제임스William James 등의 이론이다. 베르그송은 제임스의 견해에 동의하면서, 신체적 노력이 내적 감정에 미치는 영향을 살피고자 했다.
    황수영, Ibid., pp.35-36. [본문으로]
  6.  정조적 감각은 따라서 “앞으로 일어날 자동적 반응에 대한 저항”과도 같은 것이다. 유기체는 외부의 자극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기보다, 외부의 자극에 대한 내적 감정으로 말미암아 ‘자유’를 효시한다. 한편, 외부의 자극을 반영하는 표상적 감각의 경우에도 외부 대상의 양적인 변화에 따라 기계적으로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각 상태가 모두 질적으로 다른 내적 상태인 것이다.  [본문으로]
  7. 수적 다수성에서 요소들은 그 질적 차이가 추상되고 하나의 동질적인 점들로 간주된다. 그리고 그렇게 파악된 동질적 단위들은 공간 속에서 병렬된 것으로 한 번에 직관되어야 한다 (양 50마리를 세는 경우를 생각해 보라). 한편 여기에서 이용되는 단위가 정해진 수일 필요는 없는데, 곧 단위들은 무한히 잠정적으로 쪼개질 수도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논리적, 수학적, 기하학적 작업들은 모두 공간표상을 경유하는 지성의 작용에 의해 가능해지는 것이다. 

    황수영, Ibid., pp.40-42. [본문으로]

  8. 결정론자들은 자아가 어떤 고정불변의 감정들 가운데 어느 한 쪽을 택하게 되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정말 그 감정들이 언제나 변하지 않고 있다면, 어떻게 그 고착 상태가 깨지고 선택이 일어나겠는가? 주어진 감정들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언제나 보강되고 상쇄되고 상호 침투하며 변하는 것이다.  [본문으로]